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씨네맘 천준아 Apr 25. 2021

아름답다 아름다워!진짜 퍼펙트하다 퍼펙트 해

S#9.



혹자는 되도록 한글을 일찍 가르치지 말라고 당부한다. 언어의 세계를 빨리 알아버리면 정해진 어휘와 문장에 갇혀서 아이다운 상상력이 발현되는 시기를 패스해 버린다고 말이다. 나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방이는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까막눈이었는데 그 덕에 나는 한방이가 내뱉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들을 붙잡기 위해서, 한방이 어록 수첩을 따로 만들었다. 목표는 한방이의 말들을 일기처럼 메모하는 것이었지만 알다시피 모든 작심은 3일로 끝난다. 나의 기록은 보름을 넘기지 못했다. 아, 나의 작심은 15일이구나, 나란 사람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으로 마무리.     



어쨌건 그 짧은 보름의 기록을 들춰보니, 한방이가 “엄마, 나는 떨어질 예정이야.”라며 ‘예정’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날이 4살이었던 2016년 1월 2일이고, “엄마, 짜증 나! 짜증 나, 엄마.”라고 ‘짜증난다’는 표현을 처음 쓴 건 1월 5일이다. ‘짜증난다’는 사촌 형아한테 배운 거라는 출처도 언급되어 있다.     

 


<2016년 1월 12일>

 엄마는 선물 뭐 받고 싶어? 라고 물어 보길래

 반짝이는 하얀 알갱이가 달린 목걸이, 라고 대답했는데

 아~ 하얀색! 냉장고 같은 거? 라고 말했다     


이렇듯 특별할 게 없는 기록들이 보름간 이어진다. 아마도 매일 한방이가 눈부신 미사여구를 내뱉었다면 ‘이러다 우리 아들이 최연소 시집을 내려나!’ 싶어 신이 나서 기록했을 것이다. 읽다보니 보름으로 접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러다 불쑥, 엄마가 ‘꺅’하며 좋아할 문장들을 시인인 듯 시인 아닌 듯 던져주곤 했다.     

 

<2016년 1월 3일>

 ‘한방아 너는 어른이 되면 엄마보다 더 클 거야’라고 했더니,

 ‘어른이 아니라 얼음! 얼음이 되는 거야’ 라고 말했다.   


  ‘악동뮤지션’이 ‘얼음들’이라는 노래 가사에서 ‘어른들’을 ‘얼음들’에 비유한 것처럼, 난데없이 이리 던진 것이다. 악뮤는 차가운 어른들(얼음들)이 녹아서 물처럼 흐르고 섞이면 얼마나 좋을까를 풍자한 것이다. 물론 한방이는 그 의미까지 닿진 못했지만, 어른과 얼음의 유사한 발음을 스스로 찾아냈으니, 장차 랩이라도 흥얼거리지 않겠는가.     


 엄마, 러시아 수도가 모스크바인 거는

 추운 나라여서 그래

 추운 건 ‘바’가 들어가거든

 죠스바, 멜론바, 수박바     


한참 유치원에서 세계의 수도를 배울 때는 이런 말도 했다. 한글을 배우기 전이었으므로, 한방이는 ‘바’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논리적 추론을 한 게 ‘시’가 되었다. SNS에 자랑삼아 올렸더니, 친애하는 싱어송라이터 ‘피터’가 자신의 곡에 가사로 써도 되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엄마, 홍삼영양제를 먹으면

 감기에 안 걸리니까

 홍삼영양제는 겨울의 방패야     


겨울에 홍삼영양제를 챙겨 먹일 때는 이렇게 말했다. ‘홍삼영양제는 겨울의 방패’ 정말 기막힌 광고문구 아닌가. 홍삼영양제 광고주 분들 보시면 따로 연락주세요.     


어떤 저녁엔 “엄마, 추억탕이 먹고 싶어. 추억이 생각날 것 같아” 한방이는 추어탕이 추억탕인 줄 알았다. 잠자리에 누워서는 “엄마, 영혼이 사랑해~” 한방이는 영원히를 영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영혼을 다해 사랑한다고 말이다. 이게 모두 한글을 늦게 뗀 덕에 가능했다고 본다.     



어떤 날은 엄마, 오늘은 세상이 눈물방울로 보여

또 눈 내린 겨울날엔 엄마, 눈은 구름이 땅으로 내려앉은 것 같아

그리고 안개가 잔뜩 낀 날은 엄마, 안개 낀 산은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아     


‘시’는 익숙함에서 낯선 것을 건져 올리는 게 아닌가. 늘상 사용하는 뻔한 어휘와 문장들을 한방이라는 체에 걸러 보여줄 때, 잠시잠깐 내 세계도 환해지는 기분이 든다. 아마도 어린이라는 시기를 통과하는 모든 아이들은 이렇게 반짝이는 언어를 품고 있으리라.






매리 데이지 딘클

호주 마운트 웨이버리 거주. 알콜 중독에 도벽을 탑재한 꼴초 엄마와 죽은 새 박제가 취미인 아빠 밑에서 꿋꿋하게 순수한 8세. 44세 뉴요커 싱글남과 장거리 펜팔하는 게 유일한 낙






주인공 ‘메리’는 8살이다. 영화에선 메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메리의 눈동자는 진흙탕 색깔이었다. 얼굴의 점도 응가 색이었다.’ 흙빛에 응가색 점이 박힌 얼굴, 검은 머리칼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메리는 오늘도 혼자 논다. 부모에게 방치된 아이다. 메리의 아빠는 티백 공장에서 얼그레이 티백에 실을 연결하는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죽은 새들을 가져와 박제한다. 엄마는 꼴초에 알콜 중독자, 그리고 도벽까지 있다. 마트에서 물건을 옷 속에 몰래 넣는 이유는 봉투가 아깝기 때문이란다.     





“넌 사고였어!” 엄마는 이 말을 달고 산다. 메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 ‘아빠가 맥주를 다 마시면 맥주잔 안에서 발견되는 게 아기라고’ 할아버지는 설명해 준다. 그러니까 아빠가 술 마시고 제 정신이 아닌 상황에서 널 낳았다는 얘긴 거다. 하지만 8살의 순수한 메리는 맥주잔에서 아기가 나온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혹시 미국 사람들은 콜라를 많이 마시니까 콜라캔에서 아기가 나오지 않을까? 메리는 전화번호부를 뒤져 ‘맥스 제리 호로비츠’라는 뉴욕 남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맥스> : 

안타깝게도 미국에서 아기는 콜라 캔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내가 4살 때 어머니에게 물어봤을 땐 랍비가 알을 낳고 알에서 아기가 나온다고 했다.유대인이 아니면 수녀가 알을 낳겠지. 종교가 없다면 외로운 창녀가 낳겠지. 미국에서는 이렇게 나온단다  



맥스에게 도착한 동심파괴 답장! 메리가 전화번호부에서 우연히 찍은 남자, 44살 싱글남 맥스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다. 그는 사람들의 표정을 읽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표현에도 서툴다. ‘법은 지켜야 하는 것’, ‘담배꽁초는 휴지통에 버리는 것’처럼 상식을 따르고 규칙을 지켜야하는데 사람들은 자꾸 비논리적으로 행동하고 세상은 이상하게 굴러간다. 


         



<맥스> :

지난 주 난 꽁초를 128개나 주웠어, 뉴욕 사람들은 늘 함부로 버려. 왜 법을 안 지키는지 이해가 안 돼, 꽁초는 나빠, 왜냐면 바다로 쓸려가서 물고기들이 담배를 피우면 니코틴 중독이 되니까.  


44살 맥스와 8살 메리는 절친이 된다. 어린이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어른의 조건은 일단 상식이 통하고 준법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절대 공감이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외톨이인 메리는 맥스가 있어 덜 외롭다. 맥스가 양파 썰 때 빼고는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자, 메리는 슬픈 상상을 하며 빈병에 눈물을 잔뜩 담아 보낸다.    

      




<메리> : 

아저씨는 친구가 없다고 했는데 사실 저도 그래요. 어제는 학교에서 버니가 제 샌드위치에 오줌을 누었어요. 그리고 제 얼굴의 점을 놀렸죠.


<맥스> : 

많은 생각 끝에 해결책을 찾은 것 같다. 버니에게 말해. 원래 네 점은 초콜릿이고 네가 천국에 가면 초콜릿을 담당할 표시라고! (물론 거짓말이야) 난 거짓말을 싫어하지만 이 경우엔 좋은 거 같구나.


<메리> :

버니에게 말했어요. 난 천국에서 초콜릿을 담당할 거라고요. 버니는 소리치며 도망갔죠 


  

버니는 천국에서 초콜릿 왕따를 당할 것이다. 메리가 초콜릿을 담당하게 될 테니까. 메리와 맥스가 주고받는 편지를 보다보면 어느 순간 맑은 눈물이 고인다. 디톡스하는 기분이랄까. 때 묻지 않은 청정한 세계에 대한 경외감이 드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업무를 대신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 그것은 ‘시’를 쓰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마이크로소프트사가 A.I ‘샤오빙’으로 2017년에 시집 <햇살은 유리창을 잃고>를 출판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중국 시인 519명의 작품을 학습한 뒤에 가능했던 일이다. 알파고가 학습으로 배울 수 없었던 ‘이세돌의 78수’를 두는 힘이 ‘시’가 아닐까.     


아이가 자기만의 언어로 세상을 표현하는 순간을 목도하는 건 감동이다. 나는 여전히 한방이가 내어놓는 재기발랄한 언어의 세계를 기록 중이다. ‘한방아, 너는 훌륭한 시인이 될 거야.’ 거듭 아이를 격려한다. 조만간 한방이의 문장이 모이면 내돈내만으로 독립 출판을 하는 게 나의 빅피처다.



| 씬의 한 수 |



‘죽기 전에 봐야 할 ◯◯◯’ 시리즈들이 있다. 이 영화는 죽기 전이 아니라 시간 날 때마다 몇 번이라도 돌려보고 싶은 영화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는 시대에 스톱모션으로 촬영된 사랑스런 클레이 애니메이션이다. 감독 ‘Adam Elliot’는 스탭들과 함께 원시적인 방법으로 일일이 손으로 점토를 만들고 색칠하고, 배경도 그림을 그려 촬영했다면서 자신과 스텝들을 희귀종이라고 말한다. 단편 애니메이션 <하비 크럼펫 Harvie Krumpet>으로 2004년 오스카 단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Adam Elliot’은 20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뉴욕의 펜팔 친구에게서 영감을 받아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는 뉴요커 Max의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것이란다. ‘토니 콜렛’,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에릭 바나’ 등 대배우들의 목소리 연기까지 더해져 필히 인생영화 중 한 편이 될 것이다.




메리와 맥스 (Mary And Max)

제작| 2009년

등급| 12세 관람가

장르| 애니메이션, 코미디, 드라마

러닝타임| 92분

감독| 애덤 엘리어트

배우| 토니 콜렛 (메리 목소리)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맥스 목소리)          




| 아름답다 아름다워! 진짜 퍼펙트하다 퍼펙트 해 (영화 ‘우아한 세계’ 중에서)

|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소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