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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맘 천준아 Apr 17. 2021

계획을 하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거든




S#8.

계획을 하면 모든 계획이 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거든  






네 살 무렵이었다. 한방이는 한동안 병원 놀이에 심취했다. 하얀색 의사 가운을 걸친 채 인형의 배에 청진기를 이리저리 대보고 주사도 놓는 모습을 보자니 엄마 귀엔 실시간으로 BGM이 흐른다. ‘위 올 라이~’ 동시다발적으로 드라마 ‘하얀 거탑’의 장준혁 쌤이 한방이한테 잠깐 왕림했다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한방아~ 너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의사?”



엄마의 검은 속내를 눈치 챈 듯 한방이는 뒤통수를 날렸다.



“환자!”



네 살배기가 해학과 유머와 반전을 알고 그랬을까? 예능기대주도 아닌데, 요 타이밍에서 요 대사를 날려야지를 본능적으로 안 것도 아닐 테고. 절대반지를 본 스미골처럼 눈빛이 변한 엄마를 한방이는 순식간에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다섯 살 무렵이었다. 유치원에 희한하게도 친구를 무는 아이가 있었다. 무는 부위는 주로 팔이었지만 가끔 옆구리도 있었다. 선명하게 이 자국이 남도록 꽉 깨물었다. 선생님은 그 아이가 발달이 좀 늦어서 그렇다고 양해를 구했다. 매일 유치원에서 돌아와 한방이는 오늘은 누구누구가 물려서 울었다고 얘기하곤 했다.



아이고, 그 아이의 엄마는 아침저녁으로 얼마나 고개를 조아리고 다닐까, 참 딱하다는 생각에 한방이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그 아이가 어려워하는 게 있으면 옆에서 도와주고 챙겨주면 좋겠다고 말이다. 한방이는 뭘 그렇게 당연한 걸 얘기 하냐는 듯 쿨내 진동하며 ‘알았어!’ 했다. BGM이 다시 흐른다. ‘위 올 라이~’ 드라마 ‘이태원클라쓰’의 박새로이가 스치듯 지나간 그런 느낌이었다.



며칠 뒤 유치원으로 가는 길에 동네 엄마를 만났는데 자기 아들이 그 아이에게 몇 번째 물렸는지 모르겠다며 속상해 했다. 어머나, 한방이는 한 번도 안 물렸는데 왜 그럴까? 나는 나름의 이유를 상상하며 담임선생님께 호기롭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한방이한테  아이를 옆에서  도와주라고 했어요. 다른 애들은  물리는데 한방이는  번도  물린  보니 그 아이를  챙겨주나 봐요오호호호호~“



답정너 엄마가 그렸던 아들의 유치원 무용담은 산산조각이 났다.



어머니, 한방이는  아이 옆에 가지도 않아요. 물리는 애들은  아이를 가까이서 도와주다가 물린 거예요.“



아들은 엄마가 생각했던 대인배적 풍모와는 거리가 멀었고, 누구보다 물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소인배적 기질을 타고났던 것이다. 한방이는 엄마가 상상하는 것보다 항상 그 이상으로 기대를 확 꺾는 재주가 있었다.  





데이비드 우즈냑

캐나다 거주. 주체할 수 없는 정력의 소유자. 캐나다 가루지기 혹은 변강쇠로 인류의 저출산 문제를 막는데 큰 공헌을 한 인간 정자은행  






20대 시절, 남아도는 건 혈기왕성한 체력과 정력뿐이었던 사내. 데이비드는 자신이 가진 유일한 밑천이자 자랑이었던 정자를 기증하고 돈을 벌었다. 기증 당시 사용한 예명은 ‘스타벅’, 정자은행은 그의 개인 정보를 철저히 함구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씨를 뿌린 지 십 수 년이 지난 어느 날, ‘스타벅’은 전 세계에 씨를 뿌린 카페이름과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자위로 생명을 얻은 아이들이 무려 533명에 달한다는 소식. 그리고 그들 가운데 142명이 난데없이 정자은행에 아빠의 신분을 밝히라며 집단 소송을 낸 것이다.





찬란했던 과거의 정자왕은 현재 부모에게 빌붙어 사는 별 볼 일 없는 중년 아재다. 아빠가 운영하는 대형 정육점에서 배달 일을 하지만 배달의 민족보다는 배달의 민폐 느낌, 고객 불만이 폭주한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했던가, 여전히 정력은 쓸 만해서 여친은 최근 임신을 한 상태고 머지않아 데이비드는 아빠가 될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런데 연일 언론에서는 ‘스타벅이 누구인가?’ 영혼까지 끌어 모아 정자를 기증한 정력의 끝판왕 찾기에 혈안이 됐다. 자칫 자신의 신분이 노출된다면 집안의 망신 망신 개망신이   뻔했다. 다행히 데이비드의 변호사 절친은 신원을 끝까지 지켜주겠다 약속을 해준다. 그리고 변호사 친구가 건네준 종이  뭉치. 거기엔 소송을 제기한 142명의 인적사항이 담겨있다. 나에게서 나온 자식들의 얼굴이라도 보자며 후루룩 명단을 넘기던 데이비드는 깜놀한다. 네가  거기서 나와? 자신이 덕질하고 있는 스페인 프리메라 가의 천재 스트라이커가 자식 명단에 있는  아닌가.  길로 변호사 친구와 아들의 경기를 보러  데이비드는 아들의 결승골이 터지자 미친  환호한다.  






<데이비드> :

나한테 프로 축구 선수 유전자가 있었던 거야

꼭 내 분신이 결승골을 넣은 것 같아

네 자식 중에 프로 축구팀에서 뛰는 애 있어?



청출어람이 이럴 때 적절하겠다. 나에게서 나왔으나 나보다 더 나은 축구 천재 아들을 보고 데이비드는 나머지 141명도 궁금해진다. 같은 정자에서 나와 저마다의 얼굴로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아이들.

그중에는 이제 막 배우 오디션에 합격한 아이도 있고, 마약중독에 빠졌으나 이겨내려고 애쓰는 아이, 무명가수로 지하철에서 버스킹하는 아이, 수영장 안전요원인 아이, 여행지 가이드를 하는 아이, 그리고 동성애자인 아이,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아이 등등 모두 제각각이었다. 데이비드는 자신에게서 비롯된 142가지의 가능성에 대해 마치 자신의 삶이 확장된 듯한 경이로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한 부모에게서 나온 아이의 가능성이 이토록 무궁무진하다니! 그리고 동시에 그 가능성은 부모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버지 없이도 아이들은 잘 자랐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희대의 정자왕인 아들에게 뼈 때리는 조언을 한다.



<아버지> :

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다

고향을 떠나 캐나다로 올 때 아버진 내게 10불을 주셨지

근데도 난 마다할 수가 없더구나

대신 천배 갚기로 약속했지

하지만 내가 여전히 무일푼일 때 아버진 돌아가셨다


난 생각해 봤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충분히 해주지 못한 것과

자식들이 어려울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것 중

어느 게 더 마음 아프셨을까


난 매일 너희를 곁에 두고 있었던 걸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긴다

내가 이룬 가장 큰 성취야






결국 데이비드는 142명의 아이들에게 자신이 애비임을 밝히기로 마음먹는다. 그때, 주위를 얼쩡거리는 데이비드를 눈여겨 본 142명 중 한 아이가 눈치를 챈다. 그가 바로 정자 제공자임을.



<쫓아온 아이> :

무슨 일 하세요?


<데이비드> :

정육점에서 일해


<아이> :

동물을 살해하는 군요


<데이비드> :

난 그냥 배달원이야 직접 죽이진 않아 고기를 실어 나르지


<아이> :

동물 사체 운반업자군요

나는 음악가를 상상했는데...





이 대목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한방이에게 어떤 아이가 되면 좋겠다,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듯 한방이도 원하는 부모상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왜 나는 늘 아이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입장에만 서 있었던 걸까.


2008년 국제구호기구에 후원을 시작했다. 내가 후원할 아이는 르완다에 사는 꼬마 남자아이였고 8살이었다. 축구공과 스케치북, 크레파스를 새해 선물로 보냈던 기억이 난다. 선물보다 아프리카 행 배송료가 엄청나게 많이 나왔다. 아이는 받은 크레파스로 그림도 그려서 보내줬다. 그렇게 12년이 지나 국제구호기구에서 이제 성인이 된 그 아이에게 더는 후원하지 않아도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대신 다른 어린 아이를 후원하게 될 거라고 말이다.


르완다에 사는 그 아이의 여덟 살 때 사진과 스무 살이 된 사진을 나란히 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체구는 평균치에 못 미치게 작다. 하지만 그걸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건강하게 잘 자라줘서 기특했다. 무엇을 하든 무엇이 되든 그런 것보다 그냥 건강하게 잘 자랐다는 게 정말 다행이고 기쁘다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구나

성인이 되다니 너무나 축하한다

건강하게 잘 자라서 무척 기쁘구나

내가 너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결혼하기 전이었는데

어느 덧 그때 너와 나이가 비슷한 아이를 키우고 있단다

씩씩하게 성장해줘서 고맙다

늘 너의 앞날을 기원할게. 힘 내거라



한방이 역시 그렇게 지켜보면 되는 것이다. 한방아, 네가 무엇이 되든 무엇을 하든. 그저 네 자신이 되면 좋겠다.  




| 씬의 한 수|


어느 누가 정자왕 이야기에 펑펑 울 거라 생각했겠는가. 코미디인 줄 알고 봤다가 훌쩍인 관람객이 나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533명의 생명을 만들어낸 허무맹랑한 정자왕 이야기는 놀랍게도 실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자신에게 500명의 자녀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어느 정자 제공자의 뉴스를 접한 뒤, ‘켄 스콧’ 감독이 직접 각본을 썼단다. 개봉 당시 엄청난 흥행을 한 탓에 감독은 동일한 스토리로 할리우드 판을 제안 받았다. 그리하여 2013년에 ‘딜리버리 맨’이라는 제목으로, 같은 감독, 다른 배우의 리메이크 영화도 만들어졌다.




Mr.스타벅 (Starbuck)

제작| 2011년

등급| 15세 관람가

장르| 코미디

러닝타임| 103분

감독| 켄 스콧

배우| 패트릭 휴어드(데이비드 우즈냑) 앙트완 베트랑(변호사)




| 계획을 하면 모든 계획이 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거든 (영화 ‘기생충’ 중에서)

| 사진출처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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