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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맘 천준아 Mar 24. 2021

내 생김새가 어떠한가?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S#5.



해마다 떡국을 꼬박 꼬박 챙기며 나이만 먹어가는 큰딸에게 엄마는 새해 덕담 대신 ‘올해는 결혼할 거니?’ 라고 물었다. 그러면 큰딸은 래퍼도 아닌데 라임을 살려, ‘웨딩이 인생의 엔딩인가?’ 라고 읊어댔다. 결국 서른일곱이 되어서도 솔로였던 그녀는 자신을 비롯해 이른바 노처녀라고 불리는 억울한 그녀들을 위한 독립잡지 <노처녀에게 건네는 농>을 발간하기에 이른다. 누군가의 재정적 도움은 1도 없이 순수하게 내돈내만, 그러니까 방송 프로그램을 만들고 번 작가료로 내가 즐겁자고 만든 독립잡지였다. (혹시 이 잡지 구입하신 분은 제가 지금도 밤낮으로 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부디 극락왕생 하세요!)


        

 혼수로 농籠을 해가도 시원찮을 나이,

 집에선 짜내야 할 농膿이 된 지 오래.

 농濃익은 처녀들에게 건네는 농弄담.          



발간의 변도 기똥찬 라임으로 이어진다. 제호에 버젓이 ‘노처녀’라는 단어를 그대로 썼듯 <노처녀에게 건네는 농>은 셀프디스와 자학개그를 넘나드는 잡지다. ‘노처녀’라는 단어는 사회가 정한 적령기에 결혼이라는 틀에 들지 못한 미혼 여성들을 싸잡아 낙인찍는 폭력적인 단어다. 그런데 스스로 이마에 써 붙이고 등판한 꼴이었다. 진지함 이라고는 없었다는 게 발행인이자 편집인이었던 내 입장이다. 노처녀 언니들의 고민, 걱정, 일상, 바람 등등을 웃프게 실었다. 누구는 연애를 하고 싶어했고, 누구는 연애 따위엔 무감했으며, 누구는 결혼하고 싶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누구는 비혼을 꿈꾸었다. 노처녀들의 지향점은 다양했다.     



나 또한 그렇게 노처녀로 농런하다가 농농 죽겠지 싶었는데 창간호를 내고 그해 가을에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 뒤 변수가 생겼다. 아직 결혼에 관해 남친과 입장정리도 되지 않은 상황인데 떡하니 태중에 떡두꺼비가 들어선 것이다.     

피임을 안했냐고? 내 주위 음모론자들은 이게 다 나의 빅피처라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다. 로또 될 확률이나 벼락 맞을 확률에 버금가는, 찢어진 콘돔 확률이 여기서 나온다. 어느 회사인지 알 수 없으나 불량 콘돔 하나의 나비 효과가 나를 ‘갑자기 분위기 엄마’로 만든 것이다. 제가 어딜 봐서 현모양처 또는 어머니가 될 상이옵니까?






라이언 빙햄

미국 상공에서 거주. 미국 전역의 회사를 방문해 해고를 대리 전달하는 욕받이 전문가. 1년 322일 가출을 일삼는 비행 어른






라이언 빙햄의 직업은 해고 전문가다.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이 껄끄러운 말을 회사대신 전달하는 게 일이다. 당연히 일방적 통보를 받은 입장에서는 잘리는 마당이니 울분과 쌍욕, 심하면 폭력이 난무한다. 이때 라이언은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행여나 회사에 소송을 거는 불상사를 방지하고, 그들이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게끔 동기 부여까지 한다. 해고 전문가 겸 동기부여 전문가, 그러니까 병주고 약주는 게 그의 직업이다.     


1년 322일을 밖에서 지내다보니 그에게 집은 비행기와 호텔이다. 그는 승무원들과 호텔 직원들의 형식적인 미소와 예의에 대해 ‘난 이런 체계화된 친절이 좋다’고 말한다. 조금이라도 친밀한 관계는 사절, 가족들과도 거리두기를 한 지 오래다. 언제든 떠날 수 있게 단출하게 꾸린 자신의 캐리어처럼 그에게 모든 인간관계는 아쉬울 게 없고 늘 떠나도 괜찮은 사이였다. 남들처럼 가정을 꾸리고 정착하는 삶보다, 비행을 거듭하다 천만 마일리지 카드를 받는 전 세계 일곱 번째 주인공이 되는 게 그의 꿈이다.     





어느 날, 호텔 라운지에서 만난 알렉스라는 여자. 신이 나를 여자로 빚어놓으신 걸까? 그녀는 라이언과 너무나 닮은 사람이다. 매력적인 외모, 뛰어난 업무능력, 센스있는 입담, 비슷한 취향, 게다가 관계에 있어선 칼 같은 선긋기가 가능하니 여자 라이언이었다. 그녀 또한 전국을 비행하는 직종에 근무하는 관계로 두 사람은 비행 스케줄이 겹치는 공항과 호텔에서 만남을 이어간다. 여운의 감정이라곤 일절 없는 비즈니스 같은 깔끔한 연애. 그러다 점차 라이언은 그녀에게서 그동안 느껴본 적이 없는 집과 같은 평온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중, 여동생 결혼식에 참석한 라이언. 그런데 신랑신부 입장을 앞두고 갑자기 신랑이 겁이 난다며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울고 있는 여동생을 보다 못한 라이언은 팔자에도 없는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동기 부여가로서의 직업을 살려 신랑 설득에 나선다.          


 

<라이언> :

마음이 복잡하다면서?     


<신랑> :

결혼할 자신이 없어요. 어젯밤에 잠이 안 와서 결혼식을 머릿속에 떠올려 봤는데 그러다보니 생각이 자꾸 번지는 거예요. 집 사고, 첫 아이 낳고, 둘째 낳고 크리스마스에, 추수감사절, 봄 방학, 미식축구 보러 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애들은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 하겠죠. 곧 할아버지가 되고요. 은퇴해 머리카락은 빠지고 살은 찌고 그러다 죽을 거예요.


대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죠? 이유가 뭐예요? 제가 지금 뭘 하려는 거죠? 형님은 결혼 안 하셨잖아요. 결혼할 맘도 없고요. 결혼한 친구들 보면 모두 형님보다 불행해 보여요.     


<라이언> :

솔직하게 얘기할게. 결혼은 부담스러운 짐이야. 자네 말대로 결혼하면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 죽지. 정해진 길을 따라 숨 쉴 틈도 없이 살다가 다들 죽는 거야.


솔직히 나한테 이런 얘길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 . 자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혼자였는지. 누군가 있으면 (힘든 상황도) 견디기 쉬워.


사람은 누구나 부조종사가 필요하지.           





나도 결혼이 무서웠다. 시댁의 노예로 살 것 같고, 가부장적인 남자를 만나 내 커리어 따윈 없이 집순이가 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걱정을 사서 한다는 게 이런 거다. 대체로 걱정의 90%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나. 서른일곱의 나도 결혼에 관한 걱정을 이고 사는 스타일이었다. 거의 40년 가까이 보아온 다쓰베이더와 마이애미의 결혼사가 불행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즈음 나는 김형경 소설가의 <남자를 위하여>를 읽으며 결혼을 기피하는 여성들의 대다수가 아빠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문장에 깊이 공감했다. 다쓰베이더는 가정에 충실한 가장은 아니었다. 그는 여성편력이 심했고 마이애미는 바람 잘 날 없는 남편 때문에 애간장을 태웠다.     


내 사전에 없었던 결혼과 육아라는 두 단어. 결혼과 더불어 한방이를 낳을 결심까지 하게 된 데에는 두 명의 멘토가 존재한다. 이미림 심리상담가와 당시 코스모폴리탄 에디터였던 곽정은 기자. 두 분과의 만남은 노처녀잡지에 실을 인터뷰 때문이었다.     


먼저, 이미림 상담가는 연애나 결혼을 하고 싶은데 못하는 노처녀와 노총각들을 ‘스스로를 잘 모르는 어른 아이’라고 잘라 말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나는 마치 자동차 까딱이 인형이 된 줄 알았다. 구구절절 일백퍼센트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던 터라 인터뷰 직후 바로 4주 상담코스를 끊고야 말았다. 그리고 일대일로 만난 첫 상담 날, 그녀는 나의 가정사를 죽 듣더니 툭하고 한 마디 던졌다.     



 준아 씨를 낳았을 때 아버지는 몇 살이었나요?     



머릿속으로 다쓰베이더가 나를 낳았던 나이를 셈하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나는 펑펑 울고 말았다. 다쓰베이더는 고작 스물여섯이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 순간 나는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불성실했던 그의 지난 과거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내게 비혼을 결심하게 만든 존재에 대한 오랜 체증이 그날을 시작으로 조금씩 뚫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4주 상담이 끝나고 나자, 나는 아이를 벗고 이제야 비로소 어른의 세계에 발을 디딘 스스로를 마주했다. 이제야 온전히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상대의 허물조차 품을 수 있는 대인배가 될 수 있겠다는 자신감마저 들었다. 그리고 덜컥 임신이 되었을 때도 그녀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은 엄마 자신의 어린 자아를 돌보고 성장시키는 시간이 될 거라는 격려였다.    

 

그리고, 요즘 수많은 여성들의 멘토가 되고 있는 곽정은 작가. 그녀는 자신의 이혼 경험을 솔직하게 들려주면서, 결혼 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고 했다. 내게 아주 단순하게 정리해 볼 수 있는 팁을 알려주었는데,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나누고 각각의 비중을 고려하는 방법이었다. ‘하드웨어’는 집, 직업, 연봉, 종교 같은 뼈대를 이루는 것이고, ‘소프트웨어’는 휴일을 액티브하게 보내는 지 아니면 책을 읽는지, 영화는 액션을 보는지 아니면 멜로를 보는지, 선물은 꽃다발을 사는지 아니면 실용적인 걸 사는지와 같은 취향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 스스로 자신은 소프트웨어가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하드웨어에 비중을 많이 둔 탓에 실패했다고 고백했다.     


덕분에 나는 내게 중요한 것들의 비중을 따져볼 수 있었다. 전체를 ‘10’이라고 본다면 내게 하드웨어는 ‘2’정도 중요했고, 소프트웨어가 ‘8’만큼 중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그 후, 연애를 시작할 때 상대에게서 먼저 찾은 부분이 나와 맞는 소프트웨어였고, 그러다보니 결혼 결정도 복잡하지 않았다. 그런 내게 주위에서 ‘적어도 집은 있어야 돼’라거나 ‘연봉은 얼마 이상은 돼야지’ 같은 하드웨어를 거듭 강조할 때도 귓등으로 흘릴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생각에 동의하냐고 묻는다면 절대적으로 그렇다.



| 씬의 한 수 |



라이언은 동기부여가로 활동하면서 ‘배낭’을 가지고 대중 강연을 하는데, 그 장면들이 하나같이 주옥같다. 배낭에 자신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 넣는 상상을 하는 거다. 작은 것들부터 가구, 가전제품까지 작은 배낭에 쓸어 담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짐을 짊어지고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 깨닫게 되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인간관계도 작은 배낭에 넣는 상상을 하다보면 내게 꼭 필요한 사람들을 넣기 위해 억지로 붙들어둔 의미 없는 인연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무엇보다 라이언은 오랜 비행을 마치고 알렉스가 있는 안락한 가정에 착륙하게 될까? 하는 것이 최대 관전 포인트였는데 저세상 전개가 이런 건가.




인 디 에어 (Up In The Air)

제작| 2009년

등급| 15세 관람가

장르| 코미디, 드라마, 멜로/로맨스

러닝타임| 108분

감독| 제이슨 라이트먼

배우| 조지 클루니(라이언 빙햄) 베라 파미가(알렉스 고란)      

    



| 내 생김새가 어떠한가?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영화 ‘관상’ 중에서)

| 사진 출처 : 네이버, 다음 영화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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