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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맘 천준아 Apr 03. 2021

제 목표는 목표가 없는 게 목표인데



S#6.



한방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 한글을 배웠다. 입학도 하기 전에 코로나가 터져서 학교를 두 달가량 못 갔는데 이러다 애 까막눈 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사실 요즘 한글을 모른 채로 입학하는 애들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와, 저 부모, 패기가 대단한데? 뭔가 대단한 교육관이 있나? 생각한다면 그것은 경기도 오산이다. 아니면 아이의 속도나 가능성을 기다리는 부모인가? 묻는다면 그것도 경기도 용인할 수 없다. 정답은 경기도 구리지만 ‘어떻게든 되겠지?’에 가깝다. (오글거리면서도 지명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스스로가 전라도 무안하다.)



어려서 한글을 어떻게 뗐는지 기억에 없다. 마이애미에게 물어보니 나는 네 살쯤 글을 읽었다고 했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그 역시 입학 전에 뗐고, 그 과정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단다. 한글을 입학 전에 알았다고 무슨 영재나 천재는 아니지 않나. 남편과 나도 양심이 있는 편이라 우리 DNA 결합물이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고,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부류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여기서 함정은 우리를 평균으로 설정하고 그 아래는 고려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영화 <본 얼티메이텀>에 이런 대사가 있다. ‘Hope for the best, Plan for the worst’ 최고를 희망하되, 최악을 대비하라! 하지만 평균 이상을 희망했을 뿐, 그 이하를 대비 못한 나는 큰 시험에 들었다.



일곱 살이 됐는데도 한방이는 한글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조급하지는 않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한글을 뗐던 나와 남편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고, 뇌가 문자를 받아들이는 최적의 시기가 7-8세라고 어디선가 읽었기 때문이다. 입학을 몇 달 앞두고 유치원 엄마들에게 물어보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런 저런 방법으로 한글을 하고 있었다. 추천을 받아 5세 수준의 학습지로 집에서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오 마이 갓! 신은 초단위로 나를 시험에 들게 했고, 나는 지하에 계신 세종대왕님을 자꾸만 소환했다. 아니 세종대왕님, 현명한 자는 반나절이면 깨치고, 어리석은 자도 열흘이면 깨친다고 하셨잖아요. “한방아, 세종대왕님이 이런 너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슬퍼하시겠니?”를 반복하다가 결국 나는 ‘한방이 = 바보 멍청이’ 라는 조속한 결론에 도달했다.



한방이는 뇌가 매우 청순하고도 순결한 아이였고, 가르치면 바로 리셋이 되면서 깨끗하게 초기화되었다. 가령 숱하게 ‘곰’이라는 단어를 본 뒤에, ‘고’ 밑에 들어갈 받침을 물어보면 한방이는 뭐라도 하나 걸려라 하는 식으로, ‘ㄱ?’,‘ㄴ?’,‘ㄷ?’‘ㄹ?’ 차례로 대는 식이었다. 그러니 내가 열불이 나, 안 나.  








료타

  

일본 도쿄 거주. 15년 전 등단한 소설가. 모친은 아들이 대기만성형이라 믿지만 그저 대기상태. 호구지책으로 흥신소에서 불륜전문탐정을 하나, 이혼한 전부인의 연애남이나 추적하는 중






가족들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우려내 첫 소설을 쓰고 등단한 료타. 그 후, 이렇다 할 작품 없이 무늬만 작가로 내내 천덕꾸러기 신세였다가 흥신소에 취직한다. 맡은 일은 탐정이라 쓰고 증거수집가라 읽는 불륜추적자. 작가로는 실패했지만 조작가로 능한 자신의 잔머리를 발견하는데, 한 남편이 아내의 뒷조사를 의뢰하면 그 아내를 만나 불륜증거를 조작해주겠다는 딜을 하고 이중으로 수고비를 받는 식이다. 남편에게는 의뢰비를 받고, 아내에게는 삭제비를 받고! 추가로 그 아내가 남편의 불륜 역관광을 부탁하게 되면 삼중으로 돈을 번다.



료타는 이혼한 전부인과의 사이에 중학생 아들 ‘싱고’를 둔 아빠다. 하지만 매달 5만엔의 양육비도 밀린 지 오래. 이혼의 사유가 자신의 무능력이 8할이라, 전부인과 아들에게 스미마셍한 상황이다. 중학교 야구부인 아들에게 글러브를 사주기로 약속했지만 전부인의 새남친이 선수를 친다. 심지어 제일 비싼 브랜드로. 질 수 없어서 대신 스파이크화를 사주겠다며 아들을 매장에 데려가는데, 아빠의 주머니 사정을 뻔히 아는 아들이 고른 건 저렴이 브랜드.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료타는 보란 듯 제일 비싼 스파이크화를 집어 들더니, 점원이 한눈 판 사이 스파이크화 옆면에 스크래치를 낸다. 그리곤 불량이니 싸게 달라고 딜을 한다. 료타 인생의 롤모델은 흡사 <올드보이>의 오대수, 오늘만 대충 수습한다?





그러던 어느 , 치정현장 대신 아들의 경기현장을 보러간 료타. 먼발치서 지켜보는데 전부인이 새남친과 함께 아들을 응원하러  거다. 그때 마침 타석에  싱고, 그것도 대타로 어렵게 얻은 찬스다. 그런데 방망이   휘두르지 못하고 허무하게 루킹 삼진을 당한다.  광경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료타의 혼잣말, ‘싱고는 포볼을 노린 건데…….’ 헛스윙이라도 해보지 않고, 패자처럼 타석을 나오는 싱고를 보고 엄마의 새남친은 기어이 한마디 한다.



 <새남친> :

대타로 나가서 못 친 건 제일 안타까운 거야. 승부를 걸었어야지


<싱고> :

포볼을 노린 건데…


 <새남친> :

그런 식으로 진루해봤자 영웅은 못 돼


<싱고> :

영웅 안 돼도 되거든요


<새남친> :

영웅 안 되도 돼? 싱고의 영웅은 누구니? 존경하는 사람 말야


<싱고> :

할머니요


<새남친> :

존경하는 사람을 가족이라고 하면 입시 면접에서 바로 떨어져





매사 승부를 걸지 못했던 수동형 전남편과 이혼한 엄마는, 매사 승부를 거는 공격형 새남친을 만나고 있다. 아마도 그 남자는 살아오면서 자기 뜻대로 안 풀린 적이 거의 없을 것이다. 말과 행동 모든 게 목표 지향적이니까 그에게 인생은 쉬운 게임일 수도 있겠다.


반면, 무조건 상대의 공을 치는 것만이 승부는 아니다. 인생에서 포볼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료타는 아들 싱고가 ‘포볼’을 노린다는 걸 알았다. 매번 안타를 치고 진루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1루로 나가는 방법은 다양하고 포볼도 진루하기 위한 작전이다. 며칠 뒤 료타는 아들과 단둘이 깊은 대화를 한다.




<료타> :

싱고는 크면 뭐가 되고 싶어?


<싱고> :

공무원


<료타> :

프로야구선수가 아니라?


<싱고> :

아빠는 뭐가 되고 싶었어? 되고 싶은 사람이 됐어?


<료타> :

아빠는 아직 되지 못했어. 하지만 되고 못 되고는 문제가 아냐.

중요한 건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느냐는 것이지


<싱고> :

정말?


<료타> :

정말이야. 정말이야. 정말이야. 정말이야




아들 싱고의 장래희망은 공무원이다. 그 꿈이 프로야구선수 보다 못한 거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료타는 아들 싱고에게서 자신을 보았을 거다. 방망이를 휘둘러 봤지만 매번 헛스윙이었던 인생. 그래서 그는 투수가 실수로 포볼을 던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아들 싱고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안다.


한방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이게 안 돼?’였다. 나는 이미 한글을 읽고 쓰고 잘하니까, 나는 4살 때 한글을 뗐으니까. 한글이 쉬웠던 나는 한방이의 어려움이나 괴로움은 안물안궁이었던 거다.


‘이게 안 돼?’는 레전드 오브 레전드 투수, 선동열의 단골 멘트라고 야구팬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다. 천재 투수 선동열이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이 된 후, 팀의 투수들이 던지는 모양새를 보자니 답답해서 저렇게 말했을 거라고 말이다. 선동열 입장에선 ‘이거 참 쉬운 건데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네~’ 가 아니었겠는가.


반면, ‘염경엽’도 있다. 그 역시 야구선수 출신으로 ‘넥센 히어로즈’의 수장을 맡은 바 있다. 선수시절 통산 타율이 1할 대(0.195), 그러니까 공 10개 중에 안타는 고작 1개 정도 치는 타자였다. 그가 감독이 되자, 그야말로 히어로즈 타자들이 그라운드를 날아다녔다. 그때 야구팬들은 이런 농담을 했다. 아마도 염경엽은 자기보다 훨씬 잘 때리는 선수들에게 뭘 가르칠 입장이 아니라서 ‘야! 니들 왜 이렇게 잘 치냐~ 니들 최고다~’ 이런 식으로 응원만 할 거라고.


한방이가 한글이라는 새로운 승부 앞에 섰을 때, 나의 적절한 스탠스는 무엇이었을까. 아이가 한글이라는 난생 처음 날아오는 공이 두려워서 일단 익숙해지기 위해 기다리고 있음을 눈치 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아이가 포볼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주고, 그냥 응원만 하는 게 내 몫이었을 거다.  




| 씬의 한 수 |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심호흡’이라는 주제곡이 너무나 좋다. 가사도 참 좋다. ‘꿈꾸던 미래가 어떤 것이었건, 잘 가. 어제의 나. 맑게 갠 하늘에 비행기, 구름. 나는 어디로 돌아갈까. 잃어버린 건 없을까. 잘 가. 어제의 나. 눈을 감고 불러보네. (중략) 그대여! 내가 나를 믿지 못할 때에도 그대만은 나를 믿어주었지. 꿈꾸던 미래가 어떤 것이었건, 헬로 어게인. 내일의 나. 놓아버릴 수 없으니까 한 걸음만 앞으로. 한 걸음만 앞으로. 또 한 걸음만 앞으로’  






태풍이 지나가고 (After the Storm)

제작| 2016년

등급| 12세 관람가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17분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배우| 아베 히로시(료타) 키키 키린(요시코)



| 제 목표는 목표가 없는 게 목표인데 (영화 ‘원더풀 고스트’ 중에서)

| 사진 출처: 네이버, 다음 영화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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