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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맘 천준아 Mar 17. 2021

청진기 대보니까 진단이 딱 나온다

S#4.




친구 가운데 예민한 몸뚱이를 가진 L은 자궁에서 아기가 수정되는 걸 느꼈다고 했다. 정자가 우주 같은 자궁을 헤엄쳐 난자와 도킹하는 그 순간을 느꼈다는 것인데, 허언증도 이쯤 되면 큰 병이라 생각한다. 암튼 지금도 나는 믿지 않지만 L이 느꼈다고 하니 그렇다 치자. 어찌됐건 그 정도의 극성 예민은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태아를 잉태한 모체가 경험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인데 나는 고것이 없었다.     



노 입덧, 노 식탐, 노 스트레스, 노 우울이었다. 심지어 배가 불러오니 평소에 똥배 때문에 못 입던 밀착 원피스도 대놓고 입을 수 있었다. 똥배인지 아기 배인지 아무도 모를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내 인생 통틀어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가 정확히 임신한 열 달이었다. 친구 K가 '대리모' 알바를 하라고 했을 정도니까.     



임신 7개월쯤인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둘째를 임신한 Y를 만났는데, 배의 크기나 모양새는 비슷했지만 그녀의 몸놀림은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연신 아프다고도 했다. Y가 물었다.   

  

 - 넌 배 뭉침이 어때?     

 - 배.뭉.침? 그게 뭔데? 먹는 거임?     



난생 처음 듣는 용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산부인과에 갔는데 마침 의사가 배뭉침은 어떠냐고 묻는 게 아닌가. ‘선생님. 친구도 물어보던데요. 저는 배뭉침 같은 게 없어요.’ 라고 했더니, 지금 배가 상당히 뭉쳐 있어서 하는 소립니다!’ 그 순간 남편이랑 자지러지게 웃었다.  

   


이쯤 되면 예상했겠지만 세상 세상 나만큼 둔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친구 C도 내게 말했다. 뱃속에서 태동이 느껴지면 잘 관찰해 보라고, 그게 어떤 패턴이 있다고. TV에 ‘소녀시대’가 나오면 그녀의 아들은 뱃속에서 그렇게 발을 굴렀단다. 다른 걸그룹은 사절, 오로지 소녀시대만 말이다. 그 놈 취향 참 일관되다. 하지만 배뭉침도 못 느끼는 내가 한방이의 태동 따위를 읽을 수나 있었겠는가.     



심지어, 조리원에서는 까무러칠 사건도 있었다. 신생아실 소독시간에 아이를 방으로 데려가려고 받아들었는데 한방이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나를 올려다보는 게 아닌가. 사실 태어난 이후 줄곧 눈을 안 떠서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한방아, 네가 눈 뜬 걸 아빠가 봤더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그치?” 하면서 방에 들어와 포대기를 걷었는데, 뜨악! '김◯◯님 아기' 라는 이름표가 손목과 발목에 떡하니 붙어있는 게 아닌가.   

  


어미란 자가 10개월간 품고 낳아서 며칠 동안 젖 물리며 봐온 지 새끼 얼굴도 못 알아본 거다. 그제야 아기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피부도 새하얗고 머리카락은 정갈한 데다 이목구비도 야무지게 예쁜데, 더한 반전은 여자애였다. 그때, 부랴부랴 한방이를 안고 조리원 담당자가 달려왔다. 기저귀를 갈면서 두 아이의 위치가 바뀐 것 같다고 연신 사과를 한 뒤 여자애를 데리고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한방이는 여전히 눈을 꾹 감고 있었다. 한방아, 엄마의 이런 꼬락서니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서 네가 눈을 안 뜨는 거니?     






테드 크레이머

미국 거주. 어여쁜 아내와 귀여운 아들을 둔 잘나가는 광고회사 중역에서, 가출한 아내 덕에 갑자기 분위기 워킹맘이 된 아저씨






이 남자, 테드의 둔함은 나를 뛰어 넘는다. 회사에서 중대한 광고 프로젝트의 팀장 자리를 제안 받고 한껏 들떠서 집에 돌아온 테드. 그런데 아내 조안나는 어린 아들을 재워 놓고 줄담배를 피우며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낯설고 싸한 공기를 그는 감지 못한다.     


“나 떠나!” 조안나가 말하자 “저녁은 먹었어?”라고 묻는 테드. 재차 “나 떠나!” 하고 말하는 아내에게 테드는 늦게 와서 미안하니까 그만하라고 한다. 흔들리는 동공 속에서 이별의 향기 정도는 느꼈어야 하는데 테드는 어지간히 둔감하다. 아마도 매번 이런 식으로 조안나의 감정을 묵살해왔던 모양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고구마에는 고구마, 아내는 떠나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은 채 가방을 들고 나가버린다.    

 

그동안 사랑하는 아내의 내적 갈등을 몰랐던 남자가 아들이라고 살뜰했을까. 이튿날 테드는 아들 빌리를 초등학교 앞에 데려다주면서 묻는다. “너 몇 학년이지?” 애가 초1이란 것도 이제야 알게 된 너란 아빠. 아내만 가출한 게 다행이다. 갑자기 분위기 워킹맘이 돼버린 그는 회사와 가사, 사이에서 이번 생은 망했다는 기분이 훅 든다.     





하루 일과는 이렇다. 빌리가 12첩 반상을 먹고 싶단 것도 아니고 고작 프렌치토스트를 해달라는데 시꺼멓게 태워버린다. 애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회사를 가니 수시로 지각, 회사 상사의 갈굼과 욕받이로 전락하고, 음주가무는 언감생심, 칼퇴의 아이콘이 되어 돌봄 교실로 똥줄 타게 달려간다. 집에 와선 밀린 회사일로 야근, 그러다보니 늦잠, 또 지각. 그렇게 아내 가출 후, 15개월을 버티던 어느 날 집나갔던 조안나가 등판한다. 한때, 님이었으나 남이 되어 돌아온 그녀는 빌리를 데려가겠다며 양육권 전쟁을 선포한다.     

자, 테드 입장에서 나쁜 제안은 아니다. 테드는 A4용지를 펼쳐놓고 ‘빌리 양육의 장단점’을 써내려 간다. 아무리 쥐어짜도 장점은 한 개도 못 쓰겠고, 단점은 써도 써도 부족하다. 테드가 진지하므로 궁서체로 옮긴다.



봐라, 답이 명확하게 나왔다. 정답은 ‘양육권 너나 가지세요!’ 그런데 일부러 틀린 답을 쓰듯, 테드는 극한직업을 선택한다. 무슨 영문인지 기어이 조안나와 흙탕물 싸움을 맘먹는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앞에서 테드는 자신이 빌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테드>  :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우리 아들을 위해 무엇이 최선이냐는 겁니다. 아내는 이렇게 말하곤 했죠. ‘왜 여자라고 남자처럼 야망이 없겠어?’ 그렇다면 같은 이치로 묻겠습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부모가 되는 건가요?


전 뭐가 좋은 부모인지 많이 생각해 봤습니다. 일관성과 인내심이 있어야하며, 애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럴 수 없을 때는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합니다.     


전 무슨 근거로 사람들이 감정에 있어선 여자가 남자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완벽한 아빠는 아니죠. 가끔은 인내심을 잃고 빌리가 애란 걸 망각하기도 하죠.

하지만 전 곁에 있어요. 아침을 먹고 얘기를 하고 같이 등교를 하죠. 밤엔 함께 식사를 하고 책도 읽어줍니다. 우린 함께 삶을 만들었고 서로 사랑하죠. 


조안나, 당신이 그걸 망친다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거야. 제발 그러지 마. 한 번으로 충분하잖아!          






테드는 이제 프렌치토스트도 한손으로 척척 구워내는 달인이 되었다. 그리고 매사 엄마바라기였던 아들 빌리는 테이블에 그릇과 포크를 알아서 세팅하는 새 나라의 어린이가 되었다. 웃프게도 엄마보다 서툴고 둔한 아빠랑 사는 게 아들의 독립심을 키워준 셈이다.     


‘어떤 사물을 사랑하고 그 사물에 대해 배우기 위해 시간을 투자해야만 그 사물의 진실을 바라볼 수 있다.’고 미국 작가 ‘애니 딜라드’는 말했다. 아들의 학년조차 몰랐던 둔감하고 무심했던 아빠는 15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 환골탈태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사, 육아, 회사의 미친 사이클 속에서 부성애의 쓴맛과 단맛을 두루 맛보며 빌리에 대한 애착을 장착한 것이다.     





테드의 말처럼 나도 고정관념 속에 있었다. 여자이기 때문에 모성은 기본탑재 되는 줄 알았다. 갓 태어난 아이를 가슴에 안을 때 모성은 이미 와계신 줄 알았다. 하지만 가뜩이나 둔한 나 같은 캐릭터는 모성애라는 것도 더디 오더라. 전적으로 시간이 필요했다. 한방이의 태동도 못 느끼고, 아이 얼굴도 못 알아볼 만큼 둔감했던 나란 어미도 한방이와 살을 부비적대다 보니 적어도 녀석에게 만큼은 초민감한 어미로 변모해 갔다. 일평생 수면장애 없이 꿀잠인생을 살았던 내가 한방이의 뒤척임에 잠을 설칠 줄이야, 남편의 서라운드 코골이도 못 듣는 내가 한방이의 울음소리에는 자동 기립을 하게 될 줄이야.




| 씬의 한 수 |



1980년 국내 개봉 당시 포스터 카피는 이렇다. “온美國과 全世界를 징징 울린 話題作 - 드디어 당신 앞에 왔다” 그때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대 화제작은 할리우드 최고의 전쟁 영화라 손꼽히는 <지옥의 묵시록>이었다는데, 전쟁 중의 전쟁은 역시 집안전쟁이 아니던가. 이 영화가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색상까지 5개 부문을 석권해 버렸다. 특히,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의 연기대결이 숨 막히는데 조안나가 컴백한 뒤, 아들 빌리를 데려간다고 하자, 테드가 마시던 와인잔을 갑자기 조안나가 앉은 벽으로 던지는 장면이 있다. 이게 더스틴 호프만의 애드리브였다고 한다. 와인잔이 자기 얼굴 옆에서 깨지는 순간 메릴 스트립은 얼마나 철렁했을까. 그런데 그 상태로 연기를 마치고 컷 사인이 나서야 격분했다고 한다. 와, 더스틴 호프만 인성 문제 있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Kramer Vs. Kramer)

제작| 1980년

등급| 12세 관람가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05분

감독| 로버트 벤튼

배우| 더스틴 호프만(테드 크레이머) 메릴 스트립(조안나 크레이머)          



| 청진기 대보니까 진단이 딱 나온다 (영화 ‘범죄의 재구성’ 중에서)

| 사진 출처 : 네이버, 다음 영화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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