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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맘 천준아 Jun 09. 2021

어른을 공경해야지 공격하라고 배웠냐?



S#10.




20년 동안 전 세계를 유랑한 부부가 있다. 아르헨티나에 살던 ‘잽’ 부부는 결혼 6년차였던 2000년 1월 25일, 달랑 3천 유로를 들고 여행길에 올랐다. 최고 시속이 고작 50㎞인 1928년 식 낡아빠진 골동품 같은 자동차를 타고서 말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즉각 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남편이 칼같이 떠올리며 시작된 여정이었다. 처음엔 그저 아르헨티나에서 알래스카까지 6개월 돌고 컴백하자 했다. 그런데 막상 목적지에 다다르고 보니 6개월이 너무 휙 지나간 느낌이었던 걸까. 한 번 놀아보니 죽 놀고 싶고, 돌아가 회사에 복직하자니 죽기보다 싫고, 뭐 그랬던 게 아니었을까. 사람 마음이란 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더라.



두 사람은 계속 떠나기로 한다. 모든 대륙을 넘나들었다. 2010년에는 뉴질랜드에서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도착, 아시아 여행을 시작했다. 출발 당시 가족이라곤 둘뿐이었는데 여행하는 동안 국적이 서로 다른 아이 넷 추가, 여섯 식구가 되었다. 큰 아들은 미국, 둘째 아들은 아르헨티나, 셋째인 딸은 캐나다, 그리고 막내아들은 호주에서 태어났다. 그렇게 다국적 가족은 아르헨티나를 떠난 지 20년이 지나서야 출발선으로 돌아왔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그들조차 믿기 힘들만큼 창대했다.






여행 중 아내는 수채화를 그려 팔고, 남편은 여행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호의적이어서. 그들의 꿈을 응원하고 지지해주었다. 심지어 잠자리와 식사도 대접했다. 그럼 아이들의 생활은 어땠을까? 네 명의 아이들에게 학교는 여행하며 만나는 세상 그 자체였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공원에서 레알 자연을 배우고, 미국의 케이프 캐너배럴 기지에선 로켓 발사를 목격하며 첨단 과학을 체감한다.



와, 사람이 한 번 태어나 살다 죽는데 이렇게 살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잽 부부에게 제대로 잽을 얻어맞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런데 잠깐! 의문이 생긴다. 일단 부부는 기약 없이 늘어난 여행에 대해 서로 합의를 했다. 물론 떠난 지 20년 만에 멈추게 될 줄은 미처 몰랐겠지. 하지만, 길 위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어떤가. 아이들의 동의를 얻었을 리 만무하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네 명의 아이들이 모두 여행을 좋아하는 기질을 타고 나기란 어렵지 않은가. 아이들은 부모의 뜻대로 계속 떠나야 하는 일상에 납득했을까.



내 주위에도 그런 분이 계셨다. 굉장히 자유분방한 부모를 만나 초등학교 저학년 때 1년을 통째로 해외여행을 떠났고, 중학교 때도 1년 동안 해외여행을 했단다. 그런데 돌아오면 동갑인 친구들은 다른 학년이 되어 있었고, 자신은 1년을 꿇은 꼴이 됐다. 초등시절과 중등시절 합쳐서 도합 2년을 꿇은 셈이다. 친구들과 지속적인 관계 맺기가 어려운 건 둘째 치고 부모님의 세계관이 자신과는 맞지 않았다고 그분은 회고했다. ‘부모님이 나를 남들처럼 평범하게 키웠더라면 어땠을까’ 서른을 목전에 둔 성인이 되고서도 그녀는 종종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다고 했다.






대니 포프


정해진 거처 없이 도피 중. 15년 째 국가 보안당국에 쫓기는 프로신념러 부모덕에 신분 세탁을 조기 교육받고 눈치와 줄행랑을 빠르게 습득한 인재. 하지만 위장이나 변장으로는 도저히 가려지지 않는 폭풍간지남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간지라는 것을 타고난 자와 아닌 자! 리버 피닉스가 죽기 5년 전에 찍은 이 영화를 보면 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될 것이다. 아니, 사람이 자전거를 저렇게 탈 수도 있나! 안경을 저렇게도 벗을 수 있다니! 심지어 머리카락을 저렇게 넘기는 건 본 적이 없다! 러닝타임 내내 간지라는 것이 폭발한다. 심멎과 숨멎을 번갈아 하며 심장에 무리가 오는 경이로운 경험을 한 번쯤 해보라. 리버 피닉스 찬양은 용비어천가만큼이나 길게 밤새도록 할 수 있지만,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대니’는 방과 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수상한 차들을 목격한다. 평범한 일반 고딩이라면 절대 모르고 지나쳤겠지만 대니는 이런 쪽으론 도가 텄다. 미행이 붙거나 감시하는 자들을 가려내는 추격자 민감 센서를 부모에게 조기 교육 받았기 때문.






한때 그의 부모는 명분 없는 미국의 베트남전을 반대하며 군사 연구소를 폭파한 열혈 반전 운동권이었다. 인명 피해 없이 무기만 폭파하려 했지만, 경비원 한 명이 사고로 눈을 실명하고 온 몸이 마비돼 버린다. 잡히면 철창 안에서 임종을 맞을 것 같아 젊은 부부는 그대로 도주한다. 그런데 쫓기는 긴박한 와중에도 격정적 사랑은 식을 줄 몰라, 큰아들 ‘대니’와 둘째 아들 ‘해리’가 태어났다.


한 곳에서 오래 머물면 꼬리가 잡히기 마련, 가족은 6개월마다 다른 곳으로 야반도주를 한다. 이름을 바꾸고, 머리카락도 염색하고 심지어 콘택트렌즈로 눈동자 색깔마저 바꾼다. 대니의 이름은 ‘리처드 맥낼리’ 에서 이번엔 ‘마이클 맨필드’가 되었다.


그런데, 전학 간 고등학교의 음악쌤이 대니의 놀라운 피아노 실력을 알게 된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낡은 키보드로 엄마에게 배운 탓이다. 결국 음악쌤은 대니에게 ‘줄리아드음대’를 추천하고 줄리아드에서는 대니가 오기만 한다면야 장학금도 줄 태세다. 하지만 곧 야반도주해야 할 상황이니 대니는 셀프 포기. 사정을 알 턱없는 음악쌤은 대니 엄마를 설득하고, 부부는 난생 처음 난관에 봉착한다.





<엄마> :

대니가 대학에 지원했대, 줄리아드! 가면 안 돼?


<아빠> :

공항 라운지에서 10분간 만나고 FBI가 따라다니길 바라는 거야?

그것도 평생?

우리 부모님처럼 공중전화 부스나 빨래방에서 통화하길 원해?

연락책을 통해서 소식 전하고? 그건 안 돼

그 애가 대학에 가면 다시는 못 볼 거야

난 절대 그렇게 못 해


<엄마> :

이런 일은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

세상에, 너무 멍청했어

나는 그저 우리가 함께하기만을 원했는데

우리가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봐

평생을 범죄자처럼 살고 있잖아

애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이건 불공평해

우린 자수해야 돼


<아빠> :

15년간 감옥에 갇혀서 철창 너머로 애들을 보려고?


<엄마> :

대니는 이제 다 컸어, 우리가 보내줘야 해



대니 아빠는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도 한 달 뒤에야 들었다. 15년간 범죄자로 쫓기다 보니 만날 수가 없었다. 자칫 하다간 FBI에게 들키기 십상, 늘 운동권 조직원들을 통해 소식을 전하고 받는 식이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부모가 되고 보니 자식을 못 본다는 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대니의 앞날이고 뭐고 품안에 두고 싶은 욕심만 든다.


그런 와중에 조직원 한 명이 FBI에 잡혔다는 뉴스 속보가 뜨자, 아빠는 가족들에게 당부 한다. 주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평소처럼 잘 마무리하고 접선장소에서 만나자고. 대니는 부랴부랴 자전거를 타고 가족들이 기다리는 텅 빈 공터에 도착한다. 그런데, 예고도 없이 아빠는 대니에게 정처 없이 떠나는 삶을 이제 그만 멈춰도 된다고 한다.






<아빠> :

자전거 타고 가라고!

이제 혼자 살아가야 해

줄리아드음대에 들어가


<대니> :

아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아빠> :

우리 모두 널 사랑한다

자, 이제 가서 세상을 바꿔 봐

네 엄마랑 나는 노력했다




‘리버 피닉스’는 이 영화를 찍으며 자기 가족이 살아온 것과 비슷하다고 했단다. 어린 시절, 히피족 부모는 이상한 종교에 빠져 다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남미 전역을 떠돌며 살았다. 생계는 뒷전인 부모대신 리버 피닉스가 남동생 호아킨 피닉스, 그리고 여동생들과 함께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리고 배우가 돼서는 일곱 식구의 가장 노릇을 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어떤 영화를 찍을 땐 배경지식이 부족해 곤란한 경험을 했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버 피닉스는 이런 인터뷰를 했다. “좋은 장난감을 사주는 게 훌륭한 부모가 아니다. 좋은 추억을 남겨주는 게 훌륭한 부모다.” 세계관까지 폭풍간지인 이 남자!



20년 간 전 세계를 여행한 ‘잽’ 가족의 도전은 존경할 만하다. 사회가 정해놓은 시스템, 범주를 벗어난 자유로운 삶은 많은 이들의 로망이지만 누구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란 거슬러 오르면 애초에 유랑의 DNA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정착이 주는 안전함과 풍요로움을 애써 거스른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부모덕에 네 명의 잽 아이들은 남들과 다른 삶을 선물 받았다. 하지만 부모의 바람과 아이들의 바람이 온전히 맞물리는 일이 가능할까. 부부의 정해진 스케줄에 어린 아이들은 어디까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을까.



부모라는 울타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울타리의 높이나 너비가 어느 정도면 적당할까. 너비가 고작 앞마당 수준이라면 아이는 조금 놀다가 이내 답답해질 것이다. 그리고 높이가 지나치게 높으면 아이는 바깥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될 수도 있다. 울타리는 최대한 넓게, 그리고 낮으면 좋지 않을까. 아이들이 사랑받고 있고, 안전하다고 느끼면서도 부모의 시선이나 바람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 씬의 한 수 |
                                  



원래 리버 피닉스의 성은 아버지 ‘존 리 바텀’을 따라 ‘바텀(Bottom)’ 말 그대로 '바닥‘이었다. 그런데 오랜 방랑을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와 새 삶을 시작하자는 의미에서 아버지는 ’Phoenix‘로 개명한다. 와, 아버지 작명실력 무엇? 강(River)에 불사조(Phoenix)라니! 70년 개띠인 리버 피닉스는 이 영화를 찍을 당시 열여덟 살이었다. 또래를 연기한 셈인데 장난 없는 연기력과 전설적인 미모는 그냥 천재다. 게다가 피아노까지 잘 친다. 은혜로울 지경이다. 특히, 음악쌤을 처음 만나 피아노를 치는 순간은 보자마자 내 마음 속에 저장각이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비창’ 중 2악장을 연주하는 짧은 몇 분을 전 세계 인류가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다면, 단언컨대 전쟁은 사라지고 인류는 모두 위아더월드 국면을 맞을 것이다.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제작| 1988년   

등급| 15세 관람가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20분   

감독| 시드니 루맷   


배우| 리버 피닉스 (대니 포프) 크리스틴 라티 (애니 포프) 쥬드 러쉬 (아서 포프)    



| 어른을 공경해야지 공격하라고 배웠냐?  (영화 ‘반드시 잡는다’ 중에서)   

| 사진 출처 : 다음, 네이버 영화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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