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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Nov 23. 2015

청력에 관하여

상실의 이유

  스무 살 무렵,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시기 전, 암세포는 청력까지 멀게 만들었다. 그 무렵 나는 어머니를 갑자기 잃게 될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었고 우리 두 사람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대화를 나누기 보다 바라보기만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가장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을 당사자와 그 어떤 말이라도 듣고 싶었던 나는 투병생활과 더불어 대화의 단절 때문에 더욱 지쳐갔다. 당시에 병문안을 왔던 그나마 가까운 친지에게 하소연을 했었다.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게 너무 속상해요."

 나는 어떤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시간 전에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셨고 마지막으로는 내 이름을 부르셨었다.


 어머니가 떠나시고, 아버지와 내가 남았다. 아버지와 나는 평소에도 대화를 별로 나누지 않는 편이었다.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기계 소음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일하시던 분이라 일찌감치 귀에 질병을 달고 지내셨다. 날이 갈수록 아버지가 보시는 텔레비전 소리는 커졌고, 아버지가 통화하실 때면 어디서든 티가 났다. 그런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기도 쉽지 않았다. 가볍게 오가는 일상적인 말도 몇 번을 반복하거나 큰 소리로 말해야 전달됐다. 어느새 나는 아버지와 대화를 하는 것에 마음 먹고 시작하지 않는 한 피하게 됐다. 아버지와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반복할 때는 날카로워지는 스스로의 모습을 의식하면서부터였다.

 아버지가 바깥에서 겪으실 불편함을  짐작해본다. 어느새 "내가 귀가 먹어서"라는 말씀을 하실 정도면, 의식이란 불편함도 더해진 것이다. 그 아픔은 어떤 걸까. 부모님이 겪으신 것은 육체의 기능적인 상실뿐만이 아닐 것이다.


  사람이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실은 꽤 많다.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 사물과 자연에도 상실은 존재한다. 그러나 유독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느끼는 상실은 왜 이리 혹독한 걸까.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러한 과정을 반복한다면 익숙해질까. 자신에게 벌어지는 기능적 상실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상실의 가장 큰 어려움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사라지는데 있다. 다시는 이전처럼 될 수 없는 것이다. 변화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아픔이 따른다. 어떤 것이 소중하게 되는 과정에서 쏟아진 관심과 사랑만큼 아플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픔은 내가 사랑한 만큼 겪는 책임이 된다.


  어쩌면 이 고통은 영영 사라지지 않고 익숙해지지 않을 아픔일지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품어야 하는 것이다. 저마다의 상실은 분명 아픔을 지니고 있지만 그 아픔은 사랑의 증거이다. 깊게 박히면 박힐수록 빼내기 어려운 그 무언가처럼. 내가 살아가며 깊게 받아들이고 보여줬던 '사랑'에 대한 흔적일 테니 아픔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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