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에 관한 고백
시나리오를 공부하고 싶어 극작과에 진학했었다. 생에 한번쯤은 꼭 공부해보고 싶은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도 했고, 어렵사리 운이 좋아 진학하게 된 과였다. 그러한 마음가짐은 왠지 모를 나약한 꼬리표를 스스로에게 달아 놓았다. 나이 많은 동기들 틈에서 나는 성장보다는 호기심이 강한 사람일뿐이었다. 그들이 가진 능숙하게 글을 대하는 태도와 굳건한 동기가 늘 부러웠다. 그 시절 작아진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마음 한편에 둔 글에 관한 욕망을 되새기자는 주문이었다.
1학기를 마치자마자 사정이 생겨 휴학을 하게 됐다. 자의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극작과 동기들은 모임에서나 술자리에서 자연스레 저마다의 아픔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저만큼의 아픔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글을 잘 쓰지 못 하는가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괜한 고민이었을까. 휴학을 시작하고부터 연달아 벌어진 폭풍우 같은 일은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나를 찾아왔다. 부인하고 싶어도 그것들에는 분명히 내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졸업을 앞둔 동기들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동기들의 희미한 자리가 보였다. 입학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교수님의 말씀에서 ‘앞으로 느낄 문둥병 환자와 같은 고통’과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고 싶은 욕구’에 관해 떠올렸다. 어쩌면 고통은 불가피하게 쓰고자하는 운명을 만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분명한 것은 이전보다 더 강렬하게 내안에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적극적으로 수업을 듣고, 영화를 배워보려 애썼다. 졸업 작품을 마치고 나서 얼마 안 돼 병이 찾아왔고, 1년여의 투병으로 극적인 회복을 했다. 내게 남은 것은 글을 쓰려는 것이 괜한 욕심인가에 대한 의문과 트라우마였다.
내가 글에서 느낀 애정의 근원은 ‘위로와 치유’였다. 입시를 준비하면서 읽은 이승우의 ‘생의 이면’, 투병을 하면서 위로를 얻은 미우라 아야코의 에세이처럼 생의 극한에 떠밀리지 않고 처절하게 직면하며 써내려간 작가의 글은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글은 내게 얽힌 가족과 어둠에 관해서 누설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또한, 스스로 치부같이 여긴 것에 빛을 쬘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매순간 글을 쓰면서 직면하는 것들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애써 잠잠하게 만들었던 무수한 감정들이 언어를 달고 나왔을 때, 상상하던 것보다 더 어두울 때가 많았다. 이런 글이 마침내 내가 위로를 얻은 글처럼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자신감은 여전히 부족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계속해서 쓰고 싶다는 욕구이다.
근래에는 다시 글을 쓰기위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글에 관해 가시적인 목표를 두거나 글을 써서 노출해보기도 하고, 글쓰기 관련 워크숍에 참여도 해본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누군가 내 글에 관해 이야기해주는 것은 황홀했다. 때론 기대이상의 반응을 듣고 용기를 쌓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생활의 1순위를 글로 둘 수 없는 나약함이 가로막는다. 속내를 털어 놓는 데에 급급한 나의 이야기가 창작물에 도달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도 막막하다. 누군가는 내 글을 보고 공감과 위로, 치유를 벗어나서 그 아픔과 마음껏 맞서보고 비꼬아보고 대결해보길 권했다. 스스로도 이 선에서 주저 않고 싶지는 않다. 끝까지 써보고, 마주한 세계에서 변화를 가져보고 싶다. 내게 있어서 글은 어쩌면 스스로에게 겨뤄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아주 오래 전부터 품어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