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을 들인 것은 마음을 따르는 일이었다.
비가 온다는 소식에 화분을 바깥에 내놓아야겠다는 카페 주인과 식물을 키우게 된 계기를 얘기 나눈 적이 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집에 화분이 많았거든요."
"엇? 저도요. 그래서 집 안에 식물을 들여놓게 된 것 같아요."
"맞아요. 아마도 정서에 남아서 인가 봐요."
"맞아요. 정서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오랫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던 화분에 생각지도 못했던 꽃이 피어서 기뻐하던 모습
처음으로 꽃을 피웠으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얘기하던 모습
날마다 화초에 분무기를 뿌리며, 가지치기가 필요하다고 혼잣말을 하는 모습
엄마의 모습이 그리워서였을까. 따라 하고 싶었던 걸까. 나의 공간이 생긴 지 얼마 안 돼서 화분을 들였다.
기다란 줄기에 작은 잎을 두어 개 갖고 있던 몬스테라를 구입해 식은땀을 흘려가며 분갈이를 했다. 지금은 물꽃이 1개, 화분 2개를 내어줄 만큼 무성하게 자랐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식물에 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동안은 내가 왜 화분을 좋아하게 됐는지 잊고 있었다. 그저 집안에 푸릇푸릇한 존재감을 내뿜는 모습이 좋다고 여겼다. 그러다 잠시 나눈 카페 주인과의 대화에서 그 마음을 들여보게 됐다.
얼마 전 정영선 조경가에 대한 다큐 '땅에 쓰는 시'를 보게 됐다. 영화를 보고 정영선 조경가가 만든 우리나라의 여러 조경들 속에서 마음에 들었던 장소가 여러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터뷰 중에 인상 깊었던 것은 서울 아산병원의 조경을 기획하던 마음이었다.
처음엔 서울 아산병원 역시 우리나라 곳곳의 조경과 비슷한 형태로 의뢰가 들어왔다고 했다. 이를테면 주차장 확보나 분수를 설치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정영선 조경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설득했다고 한다.
환자가 울고 싶을 때 병원 침상에서 울고 싶을지
답답한 병실을 벗어나 나무 그늘 아래서 울고 싶을지
아주 잠시 걷더라도 숲을 걷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지
환자의 보호자가 억장이 무너지도록 슬픈 마음을 달랠 때, 숨어서 울고 싶을 때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곳에 심긴 꽃들은 생명력이 강해야 한다는 것이나 숲처럼 빼곡히 나무를 심어서 병원과 분리된 공간처럼 여겨지도록 한 것, 환자로 인해 가슴이 아파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을 조경에도 녹인다는 것, 그런 것이 바로 사람을 위한 조경이라고 느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정영선 조경가의 전시[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가 진행 중이란 소식을 듣고, 영화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다녀왔다.
얼마 전 아버지가 집들이 선물로 준 커피난(막실라리아)이 꽃을 틔웠다. 아버지는 지난겨울과 봄을 내내 병상에서 보냈다. 기력이 쇠해진 아버지가 낯설 어질 무렵, 베란다에서 무심하게 놓여있던 난에서 꽃이 피었고, 이름처럼 진한 커피 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토록 집안 곳곳에 식물들은 내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공간과 시간을 떠오르게 해 준다. 그런 것이 정영선 조경가가 말하는 '깊은 울림'이나 '치유와 회복의 순간'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