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한국인이라면 '인연'이라는 단어 앞에서 여러 감정을 느낄 것이다. 때로는 간들어지게 때로는 서글퍼지게 하는 인연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고 눈물이 날 테다. 이런 한국적 정서를 아름다운 이미지로 빚어낸 야심찬 감독과 그의 작품이 도착했다. 바로 셀린 송의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다.
영화는 유명 감독들에게도 극찬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지난 20년간 내가 본 최고의 데뷔작"이라고 평했으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2024년 1월 타임지 인터뷰에서 애프터썬과 더불어 흥미롭게 본 2023년 영화로 언급했다.
한국에서는 2024년 3월 6일에 개봉했지만, 작품은 일찍이 제39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어서 제73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도 초청됐다. 이렇듯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으며 독립영화로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어린 시절 헤어진 뒤 24년 만에 뉴욕에서 재회하며 두 남녀의 운명적인 이틀을 그린 영화다. 나영(그레타 리, 문승아)과 해성(유태오, 임승민)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인연의 실타래를 이어갈지를 지켜보는 것이 관건이다.
※ 이 글은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극 중 '나영'은 본문에서 '노라'로 표기되기도 합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셀린 송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 나영처럼 12살에 캐나다로 이민을 간 셀린 송 감독은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송강호 배우의 출세작 <넘버 3>를 제작한 송능한 감독의 딸이다. 각본가이자 감독이었던 아버지를 닮아 셀린 송의 언어적 감각은 타고 난 듯하다. <패스트 라이브즈> 이전에 10년간 극작가로서 연극을 했던 셀린 송은 '영화'라는 전혀 다른 매체를 택하며 자전적인 이야기를 활자화한다. 이는 간결한 연출과 우아한 각본을 거쳐 시각예술로 새로이 탄생한다.
셀린 송 감독은 데뷔작에서부터 자신의 플롯을 시각화시키며 비주얼리스트로서의 재능을 보여준다. 해성과 나영, 아서가 바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면부터 해성과 나영이 24년 만에 뉴욕에서 재회하는 장면까지. 카메라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관객도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바라볼지 선택하게 된다. 카메라가 패닝하면서 두 사람의 눈빛을 담아낼 때면 관객은 벅차오르면서 어딘가 애절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너무 근사한 얘기잖아
어린 시절 첫사랑이 20년 후 재회해서
운명의 연인임을 깨닫는다
이 이야기 속에서 난 운명을 가로막는
못돼먹은 남편이겠지
남편 아서의 말처럼 노라와 해성은 운명의 인연이었지만, 그들은 끝내 인연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셀린 송 감독은 작품에 대해 명확하고 일관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인연'이라는 개념을 꾸준히 밀고 나아간다는 것이다. 인연은 간혹 섭리나 운명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람들 간의 관계를 의미하고 한 일생을 넘어서까지 연장된다. 이 개념은 노라를 통해 아서에게, 또 서양의 관객들에게 설명된다. '인연'에 대한 대화를 통해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가끔은 두 인물이 꼭 대단한 운명이나 숙명을 통해 만나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같은 학교를 다닌 해성과 노라처럼 단순한 만남만으로도 기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노라와 해성이 헤어질 때 해성의 대사 "만약 지금 우리가 전생이라면…"를 떠올려보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전생'도 '인연'만큼 주요한 키워드로 사용된다. 전생은 다음 생을 염두에 둔, 윤회라는 불교적 개념에서 기인한 단어이다. 영화에서 '12'라는 숫자는 특별한 위치를 갖는다. 12살에 헤어지고, 12년 만에 연락이 닿고, 다시 12년이 흘러 재회한다. 해성과 노라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이를 합한 24시간이다. 또 12시간은 반나절을 뜻하며, 24시간은 하루를 의미한다. 12라는 숫자는 윤회의 사슬인 '12연기'라는 불교론적 세계관과도 맞닿는다. 전생에서 인연을 맺어 현생에서 하루의 반나절을 함께 보내는 두 인물을 바라보고 있자면, 작품 속에서 전생과 현생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계 캐나다인이라 어설픈 한국말을 구사하면서도 절절한 감정연기를 보여준 그레타 리와 소년미 넘치면서 애틋한 연기를 선보이는 유태오의 존재가 오롯하게 빛난다. 하지만 이들의 연기만큼 '인연'이라는 주제가 진지하게 관객에게 전해졌는지는 의문이다. 인연을 믿느냐는 아서의 물음에 "그거 한국인들이 작업 걸 때 쓰는 말이야"라고 답하는 노라의 답변에서 그 진실성을 갸웃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금 거슬리는 부분이었지만 극 중 마음에 드는 대사도 있었다. "너는 나를 왜 찾았어?"라는 나영의 물음에 "한 번 더 보고 싶었어."라고 답하는 해성의 대답은 <패스트 라이브즈>가 하고 싶은 말들을 집약적으로 전달하는 듯했다.
끝으로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한 별점과 한줄평을 남기려 한다.
★★★
무릇 섬세한 감정연기, 다소 얄팍한 주제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