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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에서 지상으로 레벨업!했지만..

by 시네마진국

단편 영화 제작에 돈을 쓴 덕분에 생활비가 부족했다. 이대로 길거리에 나앉는 걸까…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다. 지인의 소개로 케이블 드라마 연출부에 들어갔다. 일은 무척이나 고됐지만 그만큼 돈을 많이 줬다(당시 내 기준으론 많은 돈이었다). 내가 전에 받던 금액의 1.5배에서 2배 정도 됐다. 케이블 드라마 일을 마치자마자 웹드라마의 스크립터 일을 시작했다. 너무 바빠 돈 쓸 시간이 없었다. 덕분에 예상치 않게 돈이 좀 모였다.


게다가 동생이 청년매입임대주택에 당첨됐다. 청년매입임대주택은 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지 2년이 채 안 된 34세 이하 청년에게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집을 임대해 주는 정부 사업이다. 처음으로 동생이 기특했다. 너 덕분에 드디어 반지하 탈출이 가능해졌구나..! 사무실에 살다가 고시원으로, 고시원에서 반지하로, 반지하에서 지상으로. 마치 게임에서 레벨업을 하는 기분이었다.


IMG_2098.JPG 우이동 자취방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동네 풍경


2019년 6월. 1년 간의 짧은 반지하 생활을 마치고 강북구 우이동으로 이사를 갔다. 보증금 390만 원 / 월세 33만 원의 방이었다. 보증금의 숫자가 백 단위로 떨어지지 않는 건 정부의 보조금이 포함돼서 그런 것 같다. 신월동 반지하보다 보증금이 190만 원, 월세는 18만 원이 더 비쌌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방의 크기는 신월동 반지하와 비슷했지만 큰 창으로 동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여서 훨씬 넓게 느껴졌다. 해가 무척 잘 들어서 눅눅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둘이 지내기엔 여전히 작은 크기지만 반지하에서 지내던 우리 형제에겐 모든 게 좋아 보였다.


IMG_3466.JPG 우이동 풍경

동네도 마음에 들었다. 근처 북한산 때문에 고도 제한이 있어 모든 건물이 5층을 넘지 않았다. 비행기 소음은 당연히 들리지 않았고 사람들도 시끄럽지 않았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제법 규모가 큰 도서관이 있어 책을 읽기도 좋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나 월세와 생활비였다.


앞서 말했듯 반지하에 살 때 동생은 월세를 내지 않았다. 내가 고정 수입이 있는 회사에 다녔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거다. 하지만 나도 벌이가 시원찮았고 일이 없을 땐 수입이 전혀 없는 달도 있었다. 월세와 생활비 모두를 혼자 내는 건 퍽 부담스러웠다. 이사를 오기 전 나는 동생에게 월세 일부(8만 원)와 공과금을 내라고 했다. 동생도 그러겠다고 했다. 따라서 동생이 한 달에 내야 할 돈은 13만 원 정도. 가스비나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 하더라도 15만 원 정도다. 이보다 좋은 조건이 있을까? 한 달에 13~15만 원을 내며 원룸에서 지낼 수 있다니. 게다가 지상에서!


하지만 약속과 달리 동생은 단 한 푼도 지불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배 째라는 식이었다. 월세를 입금하는 날이 되면 돈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월세를 내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했다. 협박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월세 전부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공과금만이라도 내라고 동생에게 말했다. 돈을 아끼려는 목적보다 동생이 생활력을 갖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 달에 5만 원도 내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혼자 살아갈 수 있나?


이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다시 당연하다는 듯 동생은 공과금을 내지 않았다. 화가 났지만 참았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러겠거니 했다. 그래도 공과금을 어떻게 내는지는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공과금이 얼마 나왔는지 체크하고 내게 돈을 보내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생활 습관을 길러주고 싶었다. 돈은 내가 주지만 동생이 공과금을 송금하게 만든 거다. 그리고…

전기와 가스가 끊길 뻔했다. 공과금이 얼마 나왔는지 동생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항상 고지서를 확인하고 동생에게 돈을 송금했다. 동생은 내가 준 돈을 그냥 써버렸다. 나는 당연히 전기세와 가스비를 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세 달치 전기세와 가스비가 밀려 있었다.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동생의 꿈은 회화 작가다. 주로 유화를 그렸는데 문제는 방 안에서 그린다는 거다. 안 그래도 조그만 방에 유화 캔버스를 설치해 놓고 그림을 그렸다. 유화는 수채화나 연필로 그리는 그림과 달리 말 그대로 기름을 사용한다. 그래서 방 안에는 항상 기름 냄새가 났다. 인체에 무해하다고는 하는데… 이게 정말로 괜찮은 건지 의심스러웠다. 잠깐 맡는 게 아니라 잘 때도 기름 냄새를 흡입했으니까. 결국 내가 월세와 생활비를 모두 부담하는데도 방에서 온전히 쉴 수 없게 됐다. 너무한 거 아니냐고 내가 따져 물으면 동생은 나중에 성공해서 다 갚겠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했다.


동생이 점점 이상해졌다. 일단 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 굉장히 자신감이 넘쳤지만 하루빨리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했다. 갑자기 비싼 물건을 덜컥 사기도 했다. 대화를 해보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든 때도 많았고 내 얘기는 전혀 듣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우주라고..? 그러니까 자신은 엄청 대단한 존재라서 이 세상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이쯤 되니 동생이 아픈 게 아닐까 싶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상식의 범주를 한참 벗어나 있었으니까.


알고 보니 동생은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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