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작가 : 여성 '작가'
장면 1
안내 방송이 나온 후, 연극이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그때 통로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뒤늦게 들어온 여성 관객은 맨 앞 무대로 간다. 가방을 챙기는 관객에게 눈이 쏠리는 순간, 무대에서 한 남자가 등장한다. 남성은 갑자기 여성 관객에게 오늘 공연 어땠냐고 묻는다. 여성 관객은 지하철 막차를 놓친다는 둥, 가방만 챙기러 왔을 뿐이라며 대답을 피한다. 그러나 거듭되는 물음에 여성 관객은 이 연극은 최악이었다고 말한다.
여성 관객은 지속적인 불쾌감을 토로하며 격양된 목소리로 남성과 논쟁을 벌인다. 이 연극은 남성만을 위한 연극이며, 연극에 등장하는 여성 배우는 그저 성욕 상품으로 취급된 것이 매우 불쾌하다고 말한다. 그에 맞서 남성은 이 연극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연극이며 흥행하는 무대라 말한다. 사실 남성은 여성 관객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 그의 본심을 다른 곳에 있었다. 여성 작가의 분노에서 상업적 잠재력을 인지한 남성은 자기가 연출자라 밝히며, 여성 관객에게 연극 대본을 쓰기를 제안한다. 그러나 여성 관객은 거절한다. 연극을 통해선 세상은 바뀔 수 없으며 여성 관객은 이미 그가 이 연극의 연출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둘은 몇 년 전 만난 적이 있었다. 이 둘은 작가 토론회에서 같은 팀이었다. 여성은 남성의 “연극은 세상에 맞서 늘 이상적인 곳이어야 한다”는 예술관에 매혹된다. 그 뒤 남성을 선망하여 남성과 가까워지기 위해 말을 걸지만, 남성은 여성의 예술가로서의 선망을 처참히 망가뜨린다. 당시 미성년자였던 여성을 성추행하며 그저 여성을 작가로 보지 않고, 그저 성적(性的) 대상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 뒤 여성은 연극 그리고 남성 그 자체에 큰 실망과 모순을 느끼고 만다.
두 사람의 페미니즘 논쟁은 매우 격양되고 거침없다. 여성은 작가이자 예술가로서 대등한 입장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남성의 예술관에 동경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남성에게 여성이 작가로서 능력과 잠재력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여성은 매력적인 외관과 성적(性的)상품화로 취급된다. 남성은 연상(年上)의 연출가인 자신의 위치를 무기로 여성의 격양된 목소리와 예술론은 철저히 무시되며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치부되며 여성의 목소리는 허공으로 흩어진다.
장면 2
격양된 목소리가 갑자기 멈춘다. 무대에서 새로운 배우들이 등장한다. 네 개의 의자가 무대에 놓인다. 앞서 본 연극은 현재까지 완성된 부분을 리딩 공연으로 선보인 것이며 여기까지 본 관객에게 어땠는지 묻기 위한 자리라 설명한다. 이 리딩 공연의 작가는 여성이고 연출은 남성이다. 남성 연출자와 여성 작가는 서로 다른 견해로 무대 위에서 언쟁을 벌인다. 방금 연기했던 두 배우는 둘의 눈치를 본다. 그렇게 남성 연출가와 여성 작가의 견해는 좁혀지지 못하고 여성 작가는 자신의 집으로 간다.
이 장면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여성 관객을 연기한 여배우의 대답이다. 여배우는 연출가와 작가 사이의 불편한 기류를 무마하려 자신이 나서서 관객의 질문에 대답하지만, 여배우는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한다. 남성 관객이 연극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자세한 설명을 원하지만, 남성 연출가와 여성 작가는 서로 힘겨루기를 하느라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그리고 남배우는 그저 웃을 뿐이며, 여배우는 말도 안 되는 답변을 내뱉으며 방금까지 무대 위에서 여성의 상품화에 대한 극심한 반대를 외치며 지적인 논쟁을 벌이던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멍청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우리는 자주 배우와 캐릭터를 구분하지 못한다. 지적(知的)인 연기를 한 배우가 진짜 지적(知的)일 것이라 착각한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그 배우는 그저 주어진 대본을 외워 감정을 담아 연기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연기의 가면을 벗은 배우의 맨 얼굴을 본 장면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장면 3
집에 돌아온 여성 작가의 집에는 남자친구가 분홍색 앞치마를 매고 식사를 준비한다. 둘은 식사 전 관계를 맺는다. 남성은 기뻐하지만, 여성은 그저 운동한 기분이다. 남성은 계속 들떠있다. 그 이유는 여성의 작품이 영화화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은 자기 극본을 영화화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자신의 아이를 강간하게 놔두는 것과 같다. 피카소에게 그리고 싶지 않은 그림을 그리라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신 또한 남성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수는 없다며 소리친다.
이 장면은 여성 작가와 남자친구의 대립이 눈에 띈다. 이 둘의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성 작가의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둘은 화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남성 연출가가 등장하여 극의 흐름을 바꾼다. 어두워진 조명,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기 울음소리는 여성 작가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여성 작가는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키고자 한다. 여성 작가로서 승승장구하는 커리어와 집에 돌아가면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친구, 만족스럽지 않은 관계지만 그래도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은 다른 사람에게 안정적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정적이라 생각했던 관계는 남성 연출가의 손 튕김 소리에 처참히 무너진다.
장면 4
암전 상태에서 부분 조명만 비친다. 무대 위에는 여성의 독백만이 들린다. 한 여성이 도시의 삶을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여성은 또 다른 여성을 만난다. 여성은 서로에게 엄마이자 친구이고 연인이 된다. 남성과의 관계에는 없던 동등함이 서로에겐 존재한다. 그러나 여성은 한 남성을 만나 그곳을 떠난다. 연극은 그렇게 끝이 난다.
남성 연출가가 재등장한다. 그 뒤 여성 작가가 등장하여 둘은 연극의 결말에 대해 격한 논쟁을 벌인다. 남성 연출가는 제1장처럼 극적 요소가 가득한 연극 무대를 원한다. 이런 애매모호한 결말은 무대에 올릴 수 없으니 연극의 결말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성 작가는 이 결말이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결말이며 다른 결말은 없다고 말한다. 그 둘의 대립은 매듭짓지 못하고 끝이 난다.
장면 5
여성 작가는 남성 연출가와의 논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는 여자친구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둘은 밥을 먹고 관계를 맺고 미래 이야기도 하며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중 여자친구가 아이를 갖고 싶다는 말에 초조함을 느낀 여성 작가는 그동안 거부했던 성 보조기구를 사용해보겠다고 말한다. 여성 작가는 처음에는 거부감이 일었지만, 점차 여자친구의 말을 묵살하며 여자친구의 위에서 처음으로 절정을 맛본다. 관계가 마무리되고 여성 작가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낀다.
가부장 제도를 없애기 위해 싸운 여성 작가는 그동안 남성 중심 세계에서 자신이 당한 보이지 않는 폭력을 자기보다 어린 여자친구를 억압하고 무시하며 똑같이 행동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극의 진정한 마지막, 상대 여성은 말한다. “피카소 있잖아, 그 사람은 자기가 그림을 그리는 아래에서 두 여자가 피 터지게 싸우는데도 신경도 쓰지 않고 게르니카를 그렸대” 여성 작가의 표정이 급속도로 창백해진다.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대표작으로 폭격 당시 무방비 상태로 무고하게 희생된 여성과 아이들을 모티브로 그려낸 작품이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두 여자가 피 터지게 싸우든, 이 폭격의 피해자가 주로 여성이었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여성 작가는 자본주의를 해체하고 가부장제를 전복하기 위해 극본을 쓰며 남성과 대립하며 여성인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작가인 자신의 역할에 잠식당하고 만다. 극에서 여성 작가는 자신을 피카소와 동일시한다. 이는 걸작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가의 아집을 표현한다. 이 모습은 가부장제 사회 속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가하는 남성의 모습과 닮아있다.
‘여성’ 작가 : 여성 ‘작가’
<작가>는 액자식 구성으로 연극의 1장, 4장의 독백 부분과 2장, 3장, 4장의 연출가와 작가의 대립, 5장으로 나뉜다. 전자의 구성은 ‘여성’ 작가로서 남성 중심 사상을 무너뜨리고 남성과 동등한 입장에 서고 싶은 ‘여성’ 작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후자의 연극 구성은 여성 ‘작가’로서 가부장제에 잠식당한 ‘작가’의 모습을 그려냈다.
<작가>는 세상을 살아가는 여성 작가의 다양한 고민을 담아냈다. 무대를 넘나드는 연기와 연출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연극은 아니었다. 그러나 같은 사람으로서 남성과 같은 위치에 놓이지 못하고 그들이 하는 말에 순응해야 했던 ‘여성’ 작가의 모습을 탈피하고 작가로서 사회에 맞서 싸우는 모습과 여성 ‘작가’로서 최고의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작가의 열변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러한 ‘여성’으로서의 작가와 여성으로서의 ‘작가’ 사이의 괴리감은 제4장 연극의 결말처럼 애매모호하고 뚜렷하지 않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허상에 사로잡혀 그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작가는 깨닫는다. 자신이 이제 진짜로 나가야 하는 길과 자신도 모르는 사이 빠져들었던 세상의 무서움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