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 코인 체인지
코인라커에게 삥 뜯기고 겨우 올라간 융프라우! 히말라야 영화 속에 나올 법한 눈보라만 실컷 맞고, 멋진 산세는 보지 못했다. 설산을 보러 갔는데 하얀 배경만 보였다. 마치 하얀 상자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 속에서 미친 듯이 불어오던 눈보라. 그래도 기념사진을 남기기 위해 외국인에게 사진을 부탁해본다. 하지만 그 외국 여자는 자기가 너무 춥다며, 대충 찍어 주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아예 찍지도 않았다. '그래 춥긴 했지!' 온갖 고생을 하며 올라갔는데 융프라우는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멋진 산세를 못 봐 아쉬워하며 내려가던 중 한국인 2명을 만났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들은 트래킹 코스를 가고 싶다고 한다. 그들도 나처럼 이날의 풍경이 아쉬웠나 보다. 융프라우의 멋진 풍경을 두 눈에 담았다면 나는 그들을 따라 트래킹 코스로 향했을까? 이날 우리가 갔던 코스는 1시간짜리 초급 코스였다. 미친 듯이 눈보라가 불던 융프라우 아래로 내려오니 그렇게까지 미친듯한 바람은 불지 않았다. 그래서 이날 트래킹 코스를 걷는 건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트래킹 코스를 시작하려던 순간부터 눈이 휘날렸다. 그것은 이날의 수많은 복선의 연장선이었다. 트래킹 코스는 온통 진흙탕이었다. 눈과 진흙이 뒤엉켜 내려가는 모든 길이 미끄러웠다. 눈이 살짝 녹아내릴 때가 가장 미끄러운데 그 가파르고 미끄러운 길을 걸어 내려갔으니 고생길이 훤했다. 원래 남자들한테 손잡아달라는 그런 연약한 성격이 아닌데, 그 길은 너무 미끄럽고 무서워 나 좀 살려달라며 두 명의 팔을 하나씩 붙잡고 조심조심 내려갔다. 하지만 그렇게 붙들고 내려가도 엉덩방아를 찧으며 눈 위를 나뒹굴고 말았다. '왜 나만 넘어지는 거야!' 진짜 물에 빠진 생쥐가 따로 없었다. 내가 따라가겠다고 해놓고서는 미끄럽다며, 팔을 붙잡고 짜증 부려 미안했다. 1시간 트래킹 코스라고 들었는데 우리는 4-5시간을 걸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누구 하나 다친 사람 없이 내려와서 말이다. '누가 트래킹 코스를 1시간이라고 써둔 거야?' 이날 안으로 내려왔으니 되었다. 알프스 속 미아가 되는 건 아닌가 내심 걱정했었는데 말이다. 트래킹 코스의 끝. 저 멀리 역이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신대륙 발견과도 같은 기쁨일까? 역에 도착해서야 다 젖어 버린 운동화가 춥게 느껴졌다. 나보다 함께했던 두 명의 오빠들이 더 신나 하며 좋아했다. 기념사진을 찍으며 마을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독특한 영혼의 소유자인 한 오빠는 혼자서 계속 뿌듯해하고 있었고, 나에게 장난을 계속 걸던 너구리 같은 오빠는 또 구름과자를 태우기 바빴다. '와! 여기까지 와서 구름과자를 스위스 맑은 공기보다 더 마셔대다니 대단하다. 너구리 씨.' 각자의 방식대로 기차를 기다린 지 삼십 분 정도가 되어서야 기차가 들어왔다.
한참 추운데 있다 올라탄 기차 안은 참 따뜻했다. 노곤 노곤해지며 눈이 반쯤 감길 때 즈음 너구리 오빠가 말을 꺼낸다. 이렇게 헤어지기 아쉬우니 저녁이나 먹자고. 눈보라 치던 트래킹 코스를 함께 걸어 내려온 전우애를 생각하면 그날 저녁을 함께 해야 했지만 실낱같은 나의 저질체력으로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너무 힘들어서 숙소 가서 쉬어야겠다며 그들에게 안녕을 고했다. 사실 한국표 라면을 먹고 침대 위에 눕고만 싶었다. '안녕! 우리들은 여기서 인사해요!'
개고생 한 날이었지만 추억 하나 남겼다. 나중에 한국에서 적어간 글을 보니 5월 중순까지는 트래킹 중지라고 되어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고생한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가면 개고생 할 그 길을 하필 눈보라가 날리던 날 걸어내려갔으니 집에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우리들 중 어느 누구도 그곳이 트래킹 중지 시즌인 걸 왜 몰랐을까? 그날 함께한 독특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오빠가 자꾸 미끄러져 나뒹구는 나에게 사람들 발자국만 믿고 내려가면 된다고, 오늘 안에 내려갈 수 있다며 계속 그 말을 반복해 말해주었다. 내 눈빛이 불안해 보였던 건가? 결국 사람들 발자국을 따라 계속해서 내려갔더니 기차역이 보였고, 우리는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다. 정말 독특한 사람이였다. 함께 계속 여행했다면 다이나믹한 여행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아쉽지만 우리의 일정은 여기까지!
이날 머릿속을 맴돌던 말 '사람들 발자국만 믿고 내려가면 돼.' 가끔 아직도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