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날씨였고, 조금 지친 상태였기에 올레의 봄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걷고 있었다. 그러다 돌담으로 가려진 모퉁이를 돌자, 마치 갑자기 튀어나온 무언가와 마주친 듯 함성을 지르게 만드는 풍경이 펼쳐졌다.
끝없이 드넓은 메밀밭을 만난 순간이었다. 작디작은 하얀 꽃송이들이 이렇게까지 크디큰 희열을 줄 수 있는 걸까. 길 위에 금덩이가 떨어져 있었던들 이보다 더 좋았을까. 쉽게 가라앉히기 힘든 흥분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폰을 꺼내어 최대한 그 감정을 담아보려 애썼다.
세 번째 올레 여행 3일 차. 이 날은 남편과 유난히 대화가 많았다.
걷는 것 자체에 대한 이야기였다.
길을 걸으며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과연 얼마나 될까. 날씨도, 우리의 컨디션도, 아무리 걸어도 나오지 않는 화장실의 위치도,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걷기를 선택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음"과 "예기치 못함"이 주는 희열을 알기 때문이다.
올레꾼이 신발을 신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자연이 그에게 집중하기 시작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다. 하늘도, 바람도, 메밀 밭도, 웃으며 인사를 건네주시는 할머니도 모두 올레꾼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말이다. 길 위에 발을 내딛기 시작하면 그를 위한 최대한 자연스러운 자연의 연출이 시작된다. "액션!"
메밀밭을 만났을 때 우리가 내지른 함성은 자연을 향해 "액션"을 외친 어떤 존재에게 보람찬 리액션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그 치밀한 연출 덕분에 올레는 비가 오는 날에도 구름 없는 날에도 늘 성공적인 순간이 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안전에 과하게 집중했지만, 지금은 아이의 외부 스케줄을 적극 권장하는 편이다. 안전도 중요하지만 겁이 많은 엄마의 통제 안에 있는 동안 아이를 비켜간 경험은 얼마나 많았을까. 예기치 못한 메밀밭을 만날 수 있는 순간들이 많았을 텐데.
집 밖에서 성실히 놀다 보니 알겠다. 집 밖에서 노는 것의 중요함을. 오십이 된 우리 부부도, 열일곱이 된 아이도 지금보다 더욱 바깥에서 성실히 놀도록 해봐야겠다.
(성실한 논다는 표현은, 유퀴즈에 나온 크라잉넛 한경록 씨가 했던 표현인데 맘에 쏙 들어서 따라 해 보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