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다닐 땐 아주 순응적이었던 걸 보면 이런 기질이 드러난 건 성인이 된 이후였던 것 같다.
세상에는 인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틀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이 맞추어 살아가는 틀은 공기처럼 있어도 없다고 느낄 것이다.
"본질"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생기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만들어진 틀이 불편했던 것은.
그중에서도 한국의 교육에서 특별히 갑갑함을 느꼈고, 요즘은 신앙생활에서 갑갑함을 느낀다.
교육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주어진 수많은 틀.
종교에서, 종교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틀.
수많은 아이들이 묻는다. 공부를 왜 해야 하냐고.
"학생의 본분이야"라는 대답을 삼키고, 그 질문을 반가워하며 함께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 찾아가자고 손잡을 수 있다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교회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냐고.
"의심하지 말자"라는 말 대신,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함께 드러나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
불편한 질문을 꺼내놓는 입을 가리려 하지 않고, 그 질문을 내놓기까지 흔들리며 지나왔을 그 시간을 존중하자. 가족 안에서, 조직 안에서, 관계 안에서, 주어진 역할 속에서 짊어진 틀을 느낄 때, '해오던 것'이라는 관습 아래 두려고만 하지 않기를. 누구라도 그것의 본질을 생각하고 꺼내어 말할 수 있기를.
스터디 모임을 하는데, 새로 만난 리더가 그 모임의 본질에 맞지 않는 틀을 안내한 적이 있다. 순응하는 분위기였지만, 용기를 내어 다른 의견을 제시했고 역시나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다. 다른 생각을 말하고, 듣는 경험은 언제나 어색한 공기를 만들지만, 조금씩 받아들여야 할 문화이지 않을까.
너도 나도 서로 잘하고 있는 것인지,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가기 위해서 조금 더 단단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본질을 찾고 싶은 단어 자체에 융통성 없이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그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는 융통성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알아가게 되는 경험을 한다. 이런 아이러니라니.
생각해 보면 '틀'이라는 것이 만들어질 때, 그것 만드는 사람(들)은 과연 모두에게 예외 없이 적용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핸드폰 안의 메모장을 자주 이용하는데, 그중에 2020년부터 이어 써 내려가는 페이지가 하나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 메모장의 제목이다.
"본질에 가까워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 (2023.4.1)"이라고 쓴 것이 가장 최근의 기록이다.
머리카락에 검은 물이 빠지고 희어지기 시작하면 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의 나를 보면 그 바람은 좀 틀려먹은 것 같다. 60대가 되면 어떨지 또 모르겠지만, 우선 50대에는 아직 불편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