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스탬프를 찍는 곳이 고근산 정상에 있는데, 이것은 행여라도 고근산을 놓칠까 올레꾼을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정상에 오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고근산에 서면 푸르른 제주의 남쪽 바다도 보이지만 손에 잡힐 듯 펼쳐진 한라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황홀하기까지 하다. 이번 올레 여행에서 총 네 코스를 걸었는데, 개인적으로 네 코스를 통틀어 고근산이 단연 첫 손에 꼽힌다. 하산하는 동안에도 한라산이 얼굴 앞에 위치해 주어 그 감동을 오래 이어갈 수 있다.
점심 먹을 시간이 넘겨 코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식당을 찾는데, 잘 먹지 못하는 순댓국 집들만 눈에 띄어 곤란했다. 그러다 찾은 "솔왓동산식당". 맛있게 점심을 먹고 충분히 쉰 다음에야 안 사실은, 원래 브레이크 타임이었는데 올레꾼에게 밥 안된다는 말을 차마 하실 수가 없으셨단다. 아마 종종 그래오신 것 같았다. 특별한 맛집이 아니어도 이런 곳이야말로 배도 부르고, 마음도 부르게 하는 밥 한 공기가 별미다.
제주에서 드물게 논농사를 짓는 하논 분화구를 만난다. 분화구에서 솟는 용천수가 있어 가능하다는데 가을 벼가 익을 때 와서 보면 분화구에서의 농사가 잘 지어지고 있는지 더 잘 보일 것 같았다. 분화구라 해서 금방 지나는 구간일 거라 생각했다가, 그 규모가 꽤 넓어 놀랐다. 하논분화구 방문자 센터에 오르면 분화구가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걸매생태공원을 지나 벽화가 보이면 이제 완주가 코앞이다. 한번 더 한라산을 눈에 담을 수 있는 풍광이 고맙기만 하다.
길은. 누구와 걷느냐에 따라 흙길이 꽃길이 되고, 평지가 오르막이 되기도 한다. "꽃길만 걸으세요"라고 말하지만, 그런 말로 인사하는 이조차도 누군가의 길을 자갈길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은가.
그동안 대부분의 코스를 남편과 둘이 조용히 걷다가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아이가 동행하면서 올레는 다른 길이 되었다. 아이가 못 따라오면 셋다 함께 평지도 오르막처럼 걸을 수도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오히려 아이의 노래 덕분에 오르막도 평지처럼 걷게 되는 구간들도 있었다.
꽃길까지 만들 인격은 못되더라도, 평지가 오르막으로 느껴지게 하지 않는 사회 구성원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솔직히는, 오르막이 평지처럼 느껴지는데 한 부분 감당하고 싶은 욕심을 부려본다. 솔왓동산식당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