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올레 9코스

꼭! 정방향으로 걸으시길

by 툇마루

2023년 5월 1일

9코스: 대평~화순 올레. 11.8km

기온: 14-21℃ / 햇볕이 강했지만, 아직은 봄바람에 시원함이 남아 걷기 적당했던 5월 날씨

옷차림: 긴소매 얇은 티셔츠 + 바람막이 재킷




군산오름이 메인인 9코스는 제주올레 중에 몇 안 되는 난이도 "상"인 길 중 하나다.

대평포구에서 출발 스탬프를 찍고 고개를 돌리면 처음부터 바다를 품은 박수기정의 풍광을 볼 수 있다. 그 시원한 기운으로 계속 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코스 초반부터 박수기정 뒤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길 시작점에 세워진 간새가 말이 다녔다던 "몰질"이 시작된다고 알려준다. 이 몰질이 돌길로 시작하는 오르막이라서 난이도 상이라고 하는 건가 했지만, 천만에 그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돌길에서 흙길로 바뀌지만 오르막은 계속 이어지다가 다 올라왔나 싶었을 때, 난데없이 평지에 보리밭과 함께 자그마한 무꽃들이 그간의 힘듦을 잊게 만들어주었다. 갑작스럽게 오르막이 끝난 것만으로도 기쁜데, 보리와 무꽃이 만들어준 길은 황홀함 마저 느끼게 해 주었다. 세 사람 모두 폰을 꺼내 들고 충분히 느리게 걸었다.



사실 처음에 오르막을 시작하면서 이곳이 군산오름이겠거니 하며 올랐다. 그러다 내리막이 이어지면서 눈앞에 봉우리 하나가 '내가 군산오름이오~' 하고 멀찍이 솟아있는 것이 보였다. 앞전의 오르막에 이어 한층 더 긴 오르막이 이어지는데, 이곳이 정상인가 싶은 즈음에 잘 닦인 시멘트 길을 만난다. 차로 군산오름 정상에 오는 관광객이 주차를 할 수 있는 곳이다. 군산오름 전망을 보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곳까지 차로 올라오시길 추천한다.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결코 쉽지 않은 오름이다.

다시 이어지는 마지막 오르막인 나무 계단을 오르면 정상이다. 역시 사방이 탁 트인 장관은 산을 오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한라산, 산방산, 마라도 그리고 제주의 바다까지 제대로 장관이 펼쳐져 있다. 그곳 정상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오름을 내려오는데, 아마도 여기부터가 난이도 상인 이유가 아닐까 싶었다.



오르막도 오르막이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내리막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것 같은데도 끝없이 내려가는 듯했다. 이제는 평지가 나타나겠거니 싶은 지점에서도 결코 평지가 아니다. 무릎이 그리 좋지 않은 편이라 한참을 남편과 아이의 도움을 받아 뒷걸음질 쳐 내려왔다. 9코스를 11.8km로 짧게 해 둔 게 이유가 있겠다고 이야기하면서. (무릎 보호대 착용 필수!)


우리는 숙소의 위치 등을 고려해서 역방향으로 걷는 경우가 많았는데, 9코스만큼은 정방향으로 걸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말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만약 이 끝없는 내리막길을 반대로 끝없이 오르막길로 만났다면 도중에 포기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내리막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오르막길만 하겠는가.)

혹시나 제주올레 9코스를 걸으실 계획이 있으신 분은 반드시 정방향으로 걸으시길. 역방향은 오르막길 지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9코스가 난이도 상인 이유를 하나 더 꼽아보자면, 코스 전체에 식당이나 카페처럼 제대로 쉬어갈 만한 장소가 통틀어서 딱 한 곳뿐이다. 이곳조차도 운영하지 않는 날이 있다는데 꼭 확인하고 가시길. 9코스의 오아시스 같았던 "감산리 점빵". 이곳에서 파는 라면과 샌드위치, 차도 맛나다.

충분히 쉬고 안덕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로 한참을 걷는다. 나무 데크길로 정비되어 있는데, 비가 온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계곡 물이 맑지 않아 안타까웠다. 코스 마지막에 작년에 만들어졌다는 나누리 파크가 있는데, 아직 허허벌판이다.

오르막 내리막으로 길은 가파르지만 짧은 덕분에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2시까지 (휴식시간 1시간 포함) 걸어 일찍 마무리되었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돌길이 나타나고, 시멘트길이 나타나고, 꽃길이 나타났다가, 어느새 숲길을 걷고 있다. 길 어디에도 우리의 계획이 들어갈 수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리를 움직여 걷는 것, 쉬는 타이밍을 정하는 것 그리고 의지를 갖는 것이다.

작년부터 올레를 걷기 시작하고 언제부턴가 내가 '다 와 가냐'라고 묻지 않는다 것을 알게 되었다. 목적지를 멀리 두고 지겹게 걷는 걸음을 잘 견디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성격이 급한 탓에 의지적으로 '느리게'를 인식해야 했는데, 긴 시간이 두고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유로워진 나를 느낀다. 조금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의 성취감 때문만은 아니다. 갑자기 만나는 말도 안 되게 멋진 장면, 예고 없이 쏟아지는 비, 우산을 꺾을 정도의 바람, 끝없는 메밀 꽃밭, 길 위에서 느끼는 다리의 피로감. 이런 사소한 것들이 섞여 만들어내는 예상치 못함이 선물로 느껴지기 시작한 것 같다.


제주올레가 준 예상치 못한 선물, 예상할 수 없음을 즐기게 된 것. 멋진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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