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마음 단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툇마루 Sep 21. 2023

계단에서 내려오기

올라서지도 내려서지도 않기

참 못났다 못나

올해 또 며칠 더 길어진 여름도 지나고 가을이 된 지가 언제인데 여직 그 상처를 들춰보는 내가, 참 그렇다.

깊게 찔린 줄도 모르고 밴드 하나 대충 붙였더랬다. 그러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아물지 않나 억지로 벌려보니 웬걸 병원이 필요했었네. 뒤늦게 저 깊은 아래에 새살이 돋아오는 걸 보고서야 제대로 파악했다. 그날의 대화에서 여기저기 상처가 났다는 것을.


말이 가진 힘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흔히 듣기로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이 혀라는 말도 있다. 그 힘을 제대로 체감하는 중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오던 즈음, 더는 없을 것 같던 나의 바닥을 보았다. 깊은 바닥으로부터 뿜어 나와 씻어낼 수도 없는 악취에 휘청거렸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격려받고 싶었던 욕심이 과했을까. 내 꼬락서니가 이러하다는 말에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그래, 맞아. 너 딱 그래.

조언에 실어 내게 전해진, 살벌한 혀의 힘.



잘못된 대화에는 계단이 존재한다

그 일 이후로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짐은 물론, 말할 때의 자리를 자주 생각한다. 마음이 선 자리.

혹시나 내가 계단 위에 올라가 내려다보고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는 내가 계단 아래 내려가 올려다보고 듣고 있지는 않은지.

대상이 누구든 - 어른이든 아이든, 가진 것이 많든 적든,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학벌이 어떠하든, 선생이든 학생이든, 남자든 여자든 - 단 한 계단이라도 올라서거나 내려서지 않고 자리를 잘 지키려 노력한다.

(노력해야 하는 것이 자꾸만 늘어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어렵다고 미뤄둘 수 없는 것들이 있음 또한 알게 된다. 몸에 베이도록 습관을 들일밖에.)



나를 평지에 세워주기

오래전 다니던 직장에서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이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제가 할게요."

처음엔 적극적인 모습이 좋아 보였고, 그래서 눈여겨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필요 이상으로 자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일로 바쁜 와중에도 누가 선뜻 나서지 않으면 늘 그가 손을 들었다.

언젠가 비를 맞고 외부에 다녀온 그에게 참다못해 오지랖을 펼쳤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면 좋겠다고.

20년도 넘은 일이라 그 이후로 그가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비 오던 날의 장면은 선명하다.

두 손 가득 심부름 꾸러미를 들고 비 맞은 모습.

그는 수개의 계단을 내려서서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 같았다. 겸손이라는 것과는 다른 결이었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남들도 소중히 여겨주지 않는 세상이다. 계단 위에 올라서지 않는 것만큼 내려서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이미 마음의 자리를 잘 잡은 이들이 위치를 자주 헤매는 (나처럼) 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다.

내려서 있는 이에겐 "내려다보려니 고개가 아픈데, 올라와서 나란히 서주겠니?"

올라서 있는 이에겐 "올려다보려니 고개가 아픈데, 내려와서 나란히 서주겠니?"라는

힘을 싣지 않은 말로.

누군가 나를 계단 위에 올라가 서라고 권하더라도, 너와 함께선 평지가 좋다고 말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겸손이 아닐까 싶다.


태어날 때부터 밟고선 눈에 보이는 계단은 각자에게 다르다. 당연하다. 하지만, 마음이 선 자리만큼은 계단이 없도록 평지에 함께 서도록 어렵게 노력해 보자. 계단이 높을수록 혀의 날은 살벌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서운 단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