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주는 비현실에서 벗어나기
라이프 코칭을 받으면서 내 안에 불안이 만들어내는 비현실의 존재를 알았다. 그리곤 그 비현실에서 벗어나기를 연습해야 함도 알게 되었다. 아마 크고 작게 이어지는 연습은 평생을 가지 않을까 싶다.
불안은 얼마나 상상력이 좋은지. 머릿속에 -의식 속이든 무의식 속이든- 존재하는 먼지 같이 미세한 것들을 그러모으고 엮은 다음, 엄청난 뻥튀기 실력으로 비현실을 만들고야 만다. 매번 참신하게 만들어내는 비현실에 놀라 먹히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코칭을 받기 직전 내 상태는 불안도가 높은 만큼 비현실이 곧바로 현실이 될 것만 같았다.
삼사 개월 간의 코칭이 마무리되던 날 오후,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나를 제대로 보는 것에 많이 편안해졌다. 불안이 만들어내는 비현실에 반해 현실은 평화로움 그 자체,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마음은 한결 편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이리 쉽지 않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그렇게 코칭을 마무리를 하고 현실 속 나에게 충분히 안락한 침대에 누워 휴식을 만끽하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오랜만에 엄마랑 한 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통화가 길어질수록 불편해진다는 것을 왜 떠올리지 못했는지... 역시 중간에 잠시 이야기가 끊어졌을 때, 엄마도 나도 기분이 좋았을 그때 통화를 마무리했어야 했다. 엄마의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3년 전 돌아가신 아빠에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내가 제대로 현실로 돌아오도록 해주었다.
두 분이 함께하셨던 평생 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언제나 좋은 이야기는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아빠를 모사할 때면 튀어나오는 값싼 단어들은 항상이었다. 그러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 지난 3년은 한층 부드러운 말로 아빠 이야기를 하셨기에 방심했던 것 같다. 이 날은 무엇이 요인이 되었을까, 그 직전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 미처 조심하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엄마의 되살아난 모사로 인해 내 머릿속은 날카로운 소리가 쨍 울리며 아파왔다. 3년 전 현실 속에서 울리던 소리와 두통이었다.
그랬다. 이것이 생생한 현실이었다. 날것 그대로의 내 현실이었다.
불안으로 만든 비현실에서 벗어나있는 현실에서 더 깊숙이 들어간 현실.
"엄마!" 얘기 중인 엄마가 멈출 수 있도록 소리를 높여 불렀다. '다시 타이밍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표현하라'고 나를 아끼는 내가 주문했다. 간곡하지만 힘 있게 엄마께 부탁드렸다. 이제 다시는 아빠 이야기에서 그 모사는 빼주시라고. 엄마는 당황하셨지만,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머리가 아팠다는 내 말에 미안하다고 전혀 몰랐다고 바로 사과하셨다. 죄송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나는 엄마의 지나간 비현실이 아니라, 나의 현실에서 잘 살아내고 싶었기에.
불안이 주는 비현실을 이겨낸다고 해도, 살아가야 할 현실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다.
그래도 현실을 살아낼 딱 그만큼의 힘은 내게 있는 것 같다. 불안이 나를 넘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제는 중심을 잡도록 무릎 아래 힘을 주는 방법도 야금야금 배워가고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누가 그랬는지, 그 말이 참말이구나 싶다. 이만하면 웬만큼 살았지 싶은데도 또 이렇게 걸려 넘어 지기를 반복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도, 넘어지는 건 똑같지만 일어나는 건 조금 달라진 것 같으니 이 또한 다행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