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즈음 뒤늦게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이것이 가장 두려운 것이 되었다.
그래서 정직, 투명, 가식 떨지 않기 이런 것에 강박적으로 예민했다. 그때는 단지 정직이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정도라고 생각했다. 강박적이다 보니 오히려 본질에서 변형되어가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행인 것은 예상치 못한 계기가 이어져 과민한 나를 알아차리게 되었고, 이후로 자신에 대한 생각이 깊어졌다. 다른 사람의 가식을 평가하고 탓하던 내 모습에 '노련한 가식'이 숨어 있음을 보게 되었고, 과민했던 만큼 깊게 아팠다. 바퀴벌레보다 더 싫어하던 내로남불이 나에게 덕지덕지 붙어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조금 덜 아파보려고 가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서 나 편할 대로 정의를 내렸다. 의도적으로 남을 속이거나 피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생활을 매끄럽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괜찮은 가식'이라고. 신기하게도 그러고나니 가벼워지는 면이 없지 않았고, 조금 가벼워졌다.
흔하디 흔한 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 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
깊이 아프고 나서야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자신을 제대로 보니 남을 달리 보게 된다. 아프기 이전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또 어디에 얼마만큼의 상처가 나야 하는 건지, 인생은 끝없는 배움이라는 말마저도 두려운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