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이 이렇게 무거웠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적응되지 않는 어색함이 여행 내내 감돌았다. 8년 전부터 연말이나 연초에 가족 워크숍을 위한 여행을 해왔다. 올해는 워크숍도 하고 올레길도 걸을 겸 오랜만에 제주 여행을 선택했는데, 제주에 머무는 6일 동안 마음 한구석에 이물질이 낀 듯 꺼끌거렸다.
이런 것을 두고 일상을 빼앗겼다고 하는 것인가. 자연은 여전히 아름답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지만 마치 감각을 잃은 인형처럼 무감했다. 나만 그런가 했는데, 곁에 선 아이도 남편도 비슷한 감정이었다. 일상을 벗어나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 앞에 있어도 거대한 시국의 아픔 앞에서는 감각을 살려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탓에 매일 숙소에 일찌감치 들어오게 되었고, 가족 워크숍만큼은 넉넉히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여느 해처럼 워크숍 첫 번째 순서로,
각자의 스마트폰 속의 일정표나 사진첩을 넘겨가며 한 해 동안 있었던 일을 정리해 보았다. (언제나 가장 오래 걸리는 순서다.) 1월, 2월... 그리고 12월. 한 달 한 달 짚어 보며 12개월을 지나는 동안 잊었던 것도 다시 떠올릴 수 있었고, 올해 새롭게 정착된 패턴도 보였다. 차근히 한 해를 짚어 보기 전과 후의 감상도 다르게 정리되었다. 아이는 "올해가 너무 빨리 지나간 것 좀 허무하기도 했는데, 막상 이렇게 점검해 보니 내게도 기념비적인 일이 많았네. 다시 제 리듬을 잘 회복하고 싶은 바람이 생겨요"라는 짧은 소감을 말했다.
우리 가족이 새롭게 정착한 일상은,
아빠와 안이가 함께 출근 & 등교를 하게 되면서 아침 풍경이 많이 바뀌었고, 그로 인해 나에게 가장 좋은 건 매일 아침 둘의 지하철 탑승 사진을 전송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주 더운 여름과 아주 추운 겨울 아침을 제외하고는 주말에 둘 또는 셋이 함께 걸은 것. 걸으면서 서로에게 질문하는 시간을 매번 가졌다. 그중 몇 가지만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있었다.
<아이와 같이 걸은 날의 질문>
“요즘 가장 많이 돈을 쓰는 분야는? 또는 쓰고 싶은 분야는?”
“자유로운 하루를 허락받는다면 세 식구 다 같이 하고 싶은 것은? 또 혼자 하고 싶은 것은?”
“개인적으로 마지막까지 AI나 로봇이 침범하지 않지 않았으면 하는 영역이 있다면?”
“올해 상반기가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아쉬움 vs 만족 중에 어떤 감정이 드는가? 그 이유는?”
“지난 일주일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은?”
“우주선에 혼자 고립된다면 지구에 요청할 세 가지 물건은?”
<부부만 걸은 날의 질문>
“요즘 하루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요즘 서로가 매력적으로 보일 때는 언제인지 말해주기 하자.”
“어떤 대화를 좋아해? 또는 하고 싶은 대화는 뭐야? 또는 대화 중에 이런 건 정말 없었으면 좋겠다 싶은 건?”
“최근 일주일 또는 한 달, 나의 내면의 목소리는 무엇이었는지?”
“우리 두 사람 모두 크게 일탈 없이 자랐는데 이 나이에 해보고 싶은 일탈이 있다면?”
“여름 방학 하면 떠오르는 추억은 어떤 장면이야?”
“서로의 말 중에 듣기 좋은 말과 듣기 불편한 말 하나씩 말하기”
워크숍의 두 번째 순서는,
나의 2024년을 키워드로 정리해 보면서 이어서 2025년은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나눴다. 각자의 2024년의 키워드는 달랐지만, 2025년은 새로운 도약이라는 공통점이 들어가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짤막하게 서로를 응원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쉬어가는 워크숍 세 번째 순서다.
2024년에 우리 가족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무엇인지 정리해 보는 "2024의 유행어 어워즈". 주로 가족 톡방에서 많이 쓴 단어가 수상(?)하게 되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도 웃을 수 있게 하는 단어가 수상했다.
워크숍 네 번째 순서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주로 "나 사실은..."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시간만큼은 웃으며 말하고, 웃으며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서로 암묵적으로 지켜오던 우리 안에서의 룰을 어겼더라도 말이다. (어느 정도여야 하겠지만.)
그리고 워크숍 마지막 순서는, 서로에게 편지 쓰기.
앞선 순서들은 해마다 조금씩 변하기는 해도 이 순서만큼은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다. 이 시간을 위해 여행을 떠나기 전 편지지 여섯 장과 편지 봉투 세 개를 미리 챙긴다. 1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서로에게 쓰는 편지는 연중에 쓰는 편지와는 다르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담긴다. 그리고 평소에 하기 어려웠던 말도 스스럼없이 하게 되는 연말 매직이 있는 것도 같다.
이제 아이가 열아홉 살이 되고 곧 성인이 되면서도 이어질 수 있을까 싶지만, 오히려 본인이 먼저 계속하고 싶다는 말을 내비쳐서 다행이고 고맙다. 욕심을 같아선 남편과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도 우리 가족의 전통으로 이어져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