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부터 현재까지 브런치에 매주 한 편의 글을 써오고 있다. 4년 하고 3개월 간 단 두 주를 제외하고 일주일에 한 편을 발행하자는 스스로의 다짐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다. 일주일에 하루 어김없이 글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사소한 상황들이 탈없이 잘 엮여서 내게 자리를 깔아주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글이 쌓여 한 권의 책도 낼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글을 쓰는 행위가 오히려 내게 새로운 기운이 되어주고 있다.
새삼 글쓰기에 대한 소감을 꺼내는 것은, 최근 분주한 마음으로 브런치 글을 발행하지 못하는 날이 생기면서 글쓰기에 대한 나의 마음을 명확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글을 발행하지 못한 두 주 중 한주가 바로 2주 전이었다.) 나를 분주하게 했던 일 또한 평소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그 일을 하면서도 계속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나를 보게 되었다. 한 달쯤 전부터 글 쓰는 시간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는 것을 느끼고 그 풋풋한 감정이 행여 가볍게 날아갈까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다. 그러다 잠시나마 글쓰기를 미루게 되면서 조금 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는데, 나는 내가 쓴 글을 붙들고 앉아 퇴고하는 것을 좋아하고 있었다.
글을 쓰는 데는 여러 구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글감을 떠올리는 구간,
첫 단어를 쓰기 위해 고민하는 구간,
첫 문장에 이어 생각나는 대로 갈겨쓰는 구간,
(때로는 메모해 두었던 것을 가져와 살을 붙이는 구간,)
문장의 앞뒤 순서를 바꾸고 첨삭하며 글답게 만드는 구간,
글의 마무리를 작성하는 난이도 높은 구간,
하고자 하는 말이 잘 보이는지 소리 내어 읽으며 점검하는 구간,
마지막으로 튀는 문장, 오타, 띄어쓰기 점검하는 구간.
어느 한 구간도 중요하지 않은 구간이 없지만, 퇴고 구간이 시작되면 노트북을 향해 앞으로 기우는 내 몸을 자주 뒤로 당겨 앉아야 한다. 매번 글이 잘 수정된다거나, 점점 글이 나아지는 것이 확연히 보이는 것은 아니다. 풀리지 않는 답답함도 마주하지만 시간을 들일수록 나아질 수밖에 없다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알게 된 후부터였던 것 같다. 수정을 했음에도 또 수정할 부분이 보이는 순간이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순간이 즐겁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한눈파는 부모 수업>을 출간하는 과정에서도 셀프로 4교(종이로 출력해서 교정을 보던 예전에는 첫 번째 교정지를 1교, 그다음을 2교 이런 식으로 줄여서 불렀다.)까지 보았다. 책 내용 중 기록을 옮겨 정리한 책수다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전체를 내 목소리로 녹음해 들으며 수정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듣는 듯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개면서 들으면 튀는 문장이 더 잘 들렸다. 그나마 조금 다른 각도에서 내가 쓴 글을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때는 퇴고 구간을 좋아한다는 것을 모르고 그저 최대한 말끔한 글로 책을 내고 싶은 마음인 줄로만 알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간을 좋아했다는 것이 선명히 보이는 것을.
퇴고를 왜 이리 좋아하는지, 처음엔 아마도 정돈하고 바르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평소의 성격이 글 쓰는 동안에도 어디 가지 않고 묻어 나오는 것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고는 조금 더 머물러 들여다보다가...
글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 있었고 그것 때문이겠구나 싶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발행 버튼을 누르기 전의 글은 얼마든지 내가 품고 수정할 수 있다는 사실. 더불어 실상에서 나의 말이나 행동은 퇴고할 틈 없이 발행되어서 수백 번 이불킥을 한다 해도 절대 수정되어 다시 발행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언젠가 그래서 말을 줄이게 된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뱉은 후에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의 위력이 무서웠던 때였다. 그래서 글만큼은 오래 품고 퇴고하고 또 퇴고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퇴고를 거쳐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인 글을 나는 아마도 오래오래, 어쩌면 말보다 더 애정하는 도구로 삼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