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부부_11

살아온 모든 시절의 우리는 다르니까

by 툇마루

창밖으로 보이는 나뭇잎의 흔들림에 속았다. 6월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이미 무더위라는 뉴스를 심심찮게 들어왔는데 아파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7월 나무의 짙은 산들거림에 깜빡 속아 버렸다. 바람은 그저 물기 가득한 공기를 나를 뿐이었지만 이왕 나선 걸음을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집을 나와 운동화를 고쳐 신는 것만으로도 남편의 인중에는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방학이 시작되어 여유가 생긴 아이도 같이 운동화를 꺼내 신고 나섰지만, 오랜만에 귀에 이어폰 꽂고 홀로 산책을 즐기겠노라 했다. 곧 스무 살이 될 아이와의 동행은 9층에서 시작한 엘리베이터가 1층에 닿는 짧은 동안에 그쳤다. 그리고 남편과 나는 이미 뜨거워진 햇볕을 피해 길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실개천을 건너 다니며 그늘을 찾아 걸었다.


훈: 그늘에서는 아직 좀 걸을만하네.

화: 그래도 나는 이제 당분간 실내 운동만 하는 걸로.

훈: 어차피 샤워할 건데 땀에 젖는 게 그렇게 싫어?

화: 그 얘기 또 하시네. 난 땀에 젖는 것도 싫지만, 땀이 나면 목 쪽 피부가 따끔거리도 하고, 땀 냄새에 벌레가 따라붙는 것도 싫다고요.

훈: 알겠다고요. 나는 오늘 웬일로 같이 걷겠다길래 그 사이 바뀐 건가 했지. 그럼 살살 걷다가 너무 더우면 자기는 버스 타고 먼저 들어갈래?


같이 걷기를 시작하면서 서로에 대해 사소하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정말 사소한 땀방울에 관한 것. 남편은 평소 땀이 많은 편이라 겨울에도 손수건을 필수로 챙겨 다닌다. 그래서 가능하면 집 밖에서 땀이 많이 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할 만큼 좋아하게 되면서 땀 흘리는 상황에 관대해졌다. 그런 남편을 보면서 나도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땀을 흘리는 일이 잦아졌다. 하지만 실내가 아닌 실외에서 땀 흘린 상태로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견디기 쉽지 않았다. 같이 걸으면서 서로 다름을 알았기에 날이 더워지면 남편은 나에게 나가서 걷기를 권하지 않았다. 그날은 순전히 내가 바람에 깜빡 속아 나섰던 것이다.


훈: 자, 질문 시간 시작?

화: 오케이, 질문 좀 생각해 볼까?


언제부턴가 남편이 먼저 질문 시간의 시작을 알렸다. 걷다가 잊지 않고 질문 시간을 생각해 내는 것도, 시작할까 묻는 것도 내 몫이었는데 차곡히 쌓은 질문 시간이 남편에게도 스며들어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질문을 미리 생각해두지 않고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을 나누다 보니 언제나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날도 잠시 침묵하며 걷다가 조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헤어진 아이가 떠올랐고 연이어 방학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화: "여름 방학"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장면 말해보는 거 어때?

훈: 오, 질문 좋은데?! 여름 방학이라면 할 이야기가 많지.


방학 때마다 동생들과 외갓집에 갔었다는 남편의 이야기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남편은 질문을 받고 살짝 흥이 올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외갓집 마당에 놓인 평상이 주무대인 이야기를.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또래가 비슷한 사촌들이 등장인물이었다. 무대의 특수 효과로는 낮에는 아이들의 땀 냄새, 밤에는 평상 주변을 뿌옇게 만들 만큼의 모기향 연기. 하지만 무엇보다 남편의 기억에 가장 중요한 소품은 뜨뜻미지근한 수박이었다.

7남매였던 어머님의 형제들이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아, 남편은 또래 외사촌이 많았다. 매해 여름 방학이면 아이들이 한꺼번에 외갓집으로 모였지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언제나 반갑게 품으셨다 했다. 먹이고 재우며 잊지 못할 여름 방학 추억을 만들어주셨다 했다.


훈: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평상 위에서 먹는 수박이 하나도 안 시원했거든. 평상 위로 그늘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애들이 부른다고 한 번에 모이는 것도 아니라서 이미 데워진 상태였는데, 그게 왜 그리 맛있었나 몰라.

화: 그 많은 아이들이 한꺼번에 외갓집에 모였단 말이야? 두 분이 대단하셨네. 나는 안이 어릴 때 친구들 와서 서너 시간만 놀다가도 힘들던데, 내는 몬한다 몬해.

훈: 우리 외할머니가 대단하시긴 했지. 한 번 모일 때 많으면 애들만 일고여덟 명이었으니까. 애들이 또 얼마나 까불거릴 때야. 근데 그렇게 매번 모이게 해 주셨다는 게 지금 생각해 보니까 더 대단하게 느껴지네.

동생들이랑 땀에 옷이 다 젖을 때까지 뛰어놀다가 할머니가 챙겨주시는 수박 뚝뚝 흘리면서 먹는 장면, 나는 그게 여름 방학 하면 가장 떠오르는 장면이야.

화: 나는...


처음엔 남편의 이야기를 신나게 듣다가, 나의 어릴 적 방학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 여섯 번의 여름 방학이 있었음에도 신기하리만치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 남매를 둔 엄마 아빠는 방학이 되어도 바빴고, 모르긴 해도 두 분은 방학이 되었다고 해서 아이들과 무언가 특별한 추억거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셨던 것 같다.

조금 더 떠올려볼 시간을 가진 후, 여름 방학의 한 장면이 떠올랐지만 그것은 나의 여름 방학이 아니었다. 내가 엄마가 되어서 아이와 함께 보낸, 아이의 여름 방학이었다. 아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나는 방학을 좋아하는 엄마였다. 이 질문에 답을 생각하면서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방학을 싫어하는 아이였고, 방학을 좋아하는 엄마였다는 것을.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방학을 기다려 본 적이 없었다. 방학이 시작되면서 일상의 루틴이 깨지는 것을 싫어했다. 개학을 준비하면서 밀린 방학 숙제를 하는 내가 싫었고, 밀린 일기를 쓰기 위해 쌓여있는 아빠의 신문을 뒤져 날씨를 찾아 적는 과정이 싫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개학을 앞둔 내 필통 속은 어김없이 무언가 하나는 사라지고 없었다. 절대 나타나지 않는 지우개를, 샤프를 찾아 캄캄한 장롱 아래까지 훑어도 찾지 못했다. 결국 엄마에게 싫은 소리를 들으며 문방구로 가야 했다. 자린고비 아빠의 주머니에서 어렵게 얻어내는 생활비로 오 남매를 키우는 엄마에겐 지우개 하나만큼의 지출도 가볍지 않았다. 나의 어릴 적 방학에 대한 기억은 이랬다. 외갓집에 간 기억도 대공원에 간 기억도 없었다. 방학에 대한 한 장면을 남기기엔 우리 집은 너무 컴컴했다.

그래서였는지는 그 연관성을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진심으로 아이의 방학이 즐거운 엄마였다. 시간에서 자유로워진 아이와 집에서 미술 놀이도 많이 했고, 즐길거리를 찾아 아이와 손을 잡고 나서기도 많이 했다. 아이를 위해서 ‘놀아주는’ 시간이 아니었고, 내가 ‘노는’ 시간들이었다. 어쩌면 아이 이상으로 방학을 기다리고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와 방학을 누리던 그 당시에는 내 어릴 적 방학과 비교해서 ‘아이에게라도 즐거운 방학을 만들어줘야지’ 하는 생각도, ‘어릴 때 누리지 못했던 방학을 이제라도 누려야지’ 하는 생각도 없었다. 그저 뒤늦게 학교에 가지 않는 방학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달까. 다만 남편과 질문 시간을 가진 덕분에, 나의 여름 방학도 즐거운 장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화: 우리가 어릴 때 가정 형편이 비슷해서 어린 시절 기억도 특별히 다르지 않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나 다르네. 외가 어른들이 사이가 좋으니까 아이들도 덩달아 친해지고 하는 게 참 좋은 것 같아. 많이 부럽기도 하고. 그래도 뭐, 괜찮아. 나도 안이랑 재미난 여름 방학 추억이 새로 생겼으니까.

투명 우산 사다가 안이랑 시트지를 오려 붙여가며 새로운 우산으로 만들던 장면. 그게 “여름 방학” 하면 떠오르는 최고의 한 장면이야.

훈: 좋네. 안이의 “여름 방학”의 한 장면도 궁금해진다.

화: 그러네. 있다가 한 번 물어보자.


남편은 나의 이야기에 할 말이 없었던 것인지, 할 말을 찾지 못했던 것인지, 별다른 반응 없이 듣고 있다가 “좋네.” 한 마디로 마무리했다. 어쩌면 내가 느낀 만큼의 쓸쓸함도, 다행함도 전달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소한 땀방울에 대한 감각만 다른 것이 아니라, 살아온 모든 시절에 대한 정서도 다르기에 그런 반응 또한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딱 그만큼 서로 편안해진다는 이치를 또 한 번 배운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고 답하며 또 한 때의 달랐던 서로를 알게 되었다. 다행인 건, 그런 우리가 이제는 비슷한 무게의 의지를 가지고 서로의 기억을 만들어가며 조금씩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