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부부_14

저기요, 좋아하는 계절이 어떻게 되세요?

by 툇마루

모처럼 여유가 생겨 질문 시간을 갖게 된 주말이었는데, 이렇다 할만한 질문거리가 떠오르질 않았다. 무슨 질문을 할까 생각할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질문이 있긴 했다. 좋아하는 색깔, 롤모델, 인생 영화 등 누구나 떠올리는 질문들. 그동안 이런 질문은 하지 않으려 했다. 질문 시간을 시작했을 때가 그래도 같이 살아온 지 16년쯤 되는 시기였으니, 그만큼의 세월을 함께한 부부에게 걸맞지 않은 질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였다. 게다가 명색이 “질문 시간”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준 시간인데 그런 흔한 질문이라니, 허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우리에게 떠오르는 질문이 없었을뿐더러, 웬일인지 일단 해봤다가 아님 말고 하는 생각이 들어 그 흔한 질문 중 하나를 선택했다. 처음 소개받는 자리인 것마냥 어색한 척 모드를 장착하고서.


화: 저기요, 좋아하는 계절이 어떻게 되세요?

훈: 응? 오래전에 얘기한 적 있는 것 같은데? 난 봄.


남편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나서야 한발 늦게 내가 역할극을 시도했음을 알아차렸다. 때문에 나도 곧장 소개팅녀 역할에서 빠져나와 남편에게 봄을 좋아하는 이유를 물었다. 봄을 좋아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유는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꽃이 펴서 봄이 좋다는 것. 내 남편이 맞나 싶었다. 놀란 나를 보며 남편은 설명을 덧붙였다. 꽃이 예뻐 보이는 나이가 된 것도 맞지만, 꽃은 새로움의 상징 같아서 좋다 했다. 시작, 출발 이런 것들의 상징 같다고.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봄도 꽃도 겨울을 잘 견딘 것에 대한 어떤 보상 같다 했다. 그리고 점점 따뜻해지는 봄날씨도 좋다는 등 이어지는 남편의 봄 예찬에 공감했다.


화: 대답을 들으면서 질문이 하나 더 생각났는데, 그러면 자기는 인생의 어느 계절쯤에 와 있는 거 같아?

훈: 음.. 일단 여름은 지난 것 같고.


여름이 지났다니, 처음엔 이 답변에 동의되지 않았다. 백세시대로 봤을 때 우리 나이는 아직 여름 또는 늦여름 정도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남편은 회사나 사회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며 가을쯤이겠다 했다. 나이 오십이 넘으면서 정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그 마무리가 멀지 않은 시기라는 설명에 점점 동의가 되었다. 하지만 가을에도 아직 낮 햇살이 따가울 때도 있다는 말을 들을 때는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하고 낮은 덥기도 한 기온의 변화가 있는 가을과, 50대 직장인으로서의 변화는 비슷하다는 설명이 이해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남편은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서있음을 더 정확하게 인식하는 듯 보였다. 봄을 이야기할 때 들떠 보이던 남편은 가을을 이야기하면서 진지해졌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듣는 나도 진지해졌는데, 남편의 시간과 나의 시간의 차이가 크게 느껴진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지만, 이제야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시작하고 있으니 내 인생의 계절은 여름을 지나는 중이었다. 이 여름이 빠르게 끝나버릴지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사이 이미 여름의 막바지에 와있을 수도 있지만, 상황에 상관없이 여름이라 느끼고 있었다.


훈: 아직 뜨거우시구먼. 여름 맞네.

화: 그런데 실제 계절로는 여름을 좋아하진 않는다는 사실. 모기도 다른 벌레도 여름엔 너무 많아.


남편의 진지함이 무거움으로 가려는 것 같아서 얼른 모기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다행히 남편은 새로운 길을 가는 아내를 응원한다며 여름이 아니라 봄 아니냐는 농담도 덧붙였다.

피해오던 흔한 질문이 남편 마음속의 묵직한 이야기를 끌어내 주었다. 처음 소개받는 자리에서 하게 되는 그 질문들은 다 이유가 있고 필요한 질문이었다. 흔하고 식상하다고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그 질문들 속에 귀한 것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안 이상, 덜 참신하고 덜 기발한 질문이라도 버리지 않기로 했다. 같이 살아온 세월이 10년, 20년이 되어도 좋아하는 색깔이 무엇인지, 인생 영화가 무엇인지부터 묻고, 혹시나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진 않았는지 또다시 묻는 것도 충분히 좋은 질문이 될 것이다.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요즘 많이들 말하지 않나, “오히려 좋아!”




...덧


미세먼지 매우나쁨으로 인해 나가서 걷기로 한 계획을 무르고, 나른한 아침 식탁에서 또 한 번의 흔한 질문이 오갔던 날. 그 질문들 속에 귀한 것이 숨어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화: 오랜만에 흔한 질문! 좋아하는 색깔은 무엇입니까?

훈: 난 조금 연한 파랑. 좋아하는 이유는...


이어진 대화는 5분이 채 안되어 마무리되었다. 파랑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늘처럼 일상에서 많이 접해와서 그런 것 같다였다. 정작 질문했던 나조차도 좋아하는 색깔은 코발트블루, 그보다 매력적인 색깔을 보지 못했다는 이유 말고는 딱히 꺼낼 말이 없었다.

질문의 흔함이나 기발함은 때때로 적절한 역할을 해준다. 다만 더 중요한 것은 질문이 오가는 날의 컨디션. 날씨의 컨디션과 같은 사소한 것부터 졸리는 정도나 대화를 원하는 정도의 컨디션 등에 따라 대화의 맛은 제각각이다. 날마다 사골곰탕을 먹을 순 없지 않은가. 때때로 3분이면 충분한 컵라면을 먹어줘야 사골곰탕의 진한 맛에 다시 감탄할 수 있는 것이다. 사골 국물이든 라면 국물이든 사레들리지 않고 후루룩 넘길 수 있다면 된 걸로 억지스레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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