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가 된 이후 가장 흔히 받는 질문은 소설에 대한 영감을 어떻게 얻느냐는 질문이다. 아마 그런 질문을 자주 받는 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소설가, 작가, 시인, 예술가도 마찬가지겠지. 그때마다 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말았는데 막상 그런 질문을 받게 되면 은근 쑥스러워지는 면도 없지 않았다. 뭔가 대단한 영감을 갖고 소설을 써나간다고 생각한 적이 없기에 특히 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나 역시 내 안의 뭔가가 바닥나 있다고 느껴질 때면 어떤 영감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익숙한 생활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장소에 나를 놓아두거나, 다른 장르의 예술과 문화를 접해보기도 하고 여행을 떠나거나 기사를 훑고 서적을 찾아 읽는다. 새로운 영감과 상념이 떠오르고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일어날 수 있도록 명상을 하며 자신을 비우려 하거나 때론 글쓰기를 멈추기도 한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방식들이 어쩐지 포크를 쥔 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빈 그릇을 휘휘 내젓고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정말이지 영감이란 무엇일까. 영감은 어떻게 소설을 쓰는 것으로 연결될까. 그리고 그걸 쓰게 만드는 내적 힘은 과연 무엇이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게 있어 영감이라는 것은 아직 채 발아하지 않은 하나의 씨앗처럼 느껴진다. 경험적으로 혹은 부지불식간에 아니면 여러 경로를 통해 내면의 지하에 심어진 씨앗(영감)들 중 하나가 점점 자라나 의식의 표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과정을 거친 끝에 소설이 시작되거나 구성 형태가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여겨진다. 생각해 보면 한번 떠오른 어떤 영감이 바로 단번에 소설로 연결되어 써진 적은 거의 없었다. 있더라도 더는 길게 이어 쓰지 못하거나 망하기 마련이었고. 마치 심은 씨앗이 좋으니 당장 캐서 먹거리로 사용하자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씨앗(영감)은 발아하기 전까지는 그대로 씨앗(영감)에 불과했던 것 같다.
영감을 하나의 씨앗에 비유하자면 이것을 발아하고 자라게 하는 요소들도 있지 않을까. 씨앗이 자라기 위해서는 적절한 수분과 일조량과 같이 알맞은 조건이 필요한 것처럼 영감도 그렇기 때문이다. 영감이 키워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시간 속에서 싹을 틔운 영감은 점차 숙성해 가며 단단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다. 일정 시간 동안 의식을 기울이지 않으면, 거듭해서 떠오르지 않으면, 질문하고 의심하지 않으면 품었던 영감은 형체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의 반복 끝에 영감은 언 땅을 뚫고 의식의 표면 위로 존재를 드러낼 준비를 한다. 소설가의 인식과 응시는 영감을 땅 밑에서 위로 끌어올릴 최후의 동력, 혹은 마중물과도 같다. 하나의 소설은 소설가에 의해 여과된 세계다. 현실 세계를 어떤 관점과 응시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영감은 선택되거나 폐기된다. 시간에 의해 숙성되고 현실에 대한 인식과 의식에 영감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올 때 비소로 소설은 쓰이게 된다. 그런 ‘때’를 만나게 될 때야 비로소 영감은 소설의 원천으로 이식된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로소 뽑아 올려져 먹거리로 오를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적절한 ‘때’를 마주치게 되는 것이야 말로, 한 조각의 케이크를 비로소 포크로 집은 순간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영감은 한순간 우리 앞에 떠오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떤 암시처럼 내면에 머문다. 이후 그것은 내내 질문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의심에 차오르게 하기도 한다. 영감은 친절하게만 머물지 않는다. 그런 견고한 지반을 뚫어내고 돋아나 구체화 된 영감은 단지 하나의 소설로 일단락되지 않기도 한다. 소설을 쓰게 만드는 내적인 힘을 추동하는 동체가 되어 글쓴이의, 소설가의 생애 전체를 아우른다.
'패배를 거부하는 남자'는 1927년에 발간된 헤밍웨이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단편이다. 이십 대 후반의 헤밍웨이가 쓴 이 소설은 한때 그가 열광했던 스페인의 투우가 배경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헤밍웨이가 오십 대에 발간한 소설 '노인과 바다'와 여러모로 닮아 있다. 소재와 이야기는 다르지만 작가가 줄곧 추구했던 관점이 두 소설을 관통한다. ‘노인과 바다’는 어떤 의미에서 ‘패배를 거부하는 남자’로 시작한 인간과 삶에 대한 그의 질문이 완성된 형태처럼 느껴진다.
소설은 병원에서 막 나온 마누엘은 다시 투우 일을 구하기 위해 레타나의 사무실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곳에서 마누엘은 9년 전에 자신의 동생을 죽인 박제된 투우 머리가 걸려 있는 것을 본다. 레티나는 병원에서 마누엘의 다리를 절단하려 했다던 얘기를 들었다는 사실을 말하지만, 마누엘은 다 나았다면서 아무렇지 않아 한다. 레티나는 야간 대타를 제안하고, 마누엘은 밤에 대타를 뛰다가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망설인다. 적은 보수에도 야간 투우를 승낙한 마누엘은 기마 투우사로 주리토를 떠올리고 찾아 나선다. 하지만 주리토는 그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며 기마 투우사를 관뒀다고 말한다. 주리토는 마누엘에게도 이제 관둬야 될 때라고 충고한다. 그렇지만 그 둘은 야간 투우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고, 투우가 아크등 불빛 밑으로 달려 나온다. 주리토가 창날을 어깨에 꽂아 넣기는 했지만 투우는 맹렬하게 달려든다. 투우 경기를 기사로 작성하던 비평가는 이 경기가 단순히 퇴물 투우사들의 보잘것없는 경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자리를 벗어난다. 마누엘이 황소와 사투를 벌이며 싸우는 동안 어느새 지루함을 느낀 관중들은 방석을 집어던진다. 황소를 죽였지만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 누운 마누엘은 그럼에도 나는 잘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더 이상 마누엘이 투우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렸던 주리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를 꺾을 수 있는 것은, 황소가 아니라, 그만둬야 한다는, 혹은 패배했다는 그 상실의 마음뿐이라는 사실을 그도 곧 알게 된다.
‘노인과 바다’에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노인과 황소와 위태로운 싸움을 벌이는 투우사 마누엘은 하나의 유비로 읽힌다.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노인과 바다’의 이 구절은 20대의 '패배를 거부하는 남자'에서 시작해 50대에 완성된다. 이십 대 씨앗처럼 박혀 있던 인간성에 대한 통찰과 관점이 시간과 함께 줄기처럼 뻗어나가 줄기와 꽃을 피워낸 것이다.
어쩌면 영감은 글쓴이의 시선 끝에 매달린 물방울 혹은 빛살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상의 곳곳을 바라보는 그 시선 끝에 맺히는 찰나의 긴장 혹은 특별한 조리개처럼 세상을 다르게 보이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고 보면 영감이란 창작의 불꽃이 되어 주기도 하지만 때론 떨칠 수 없는 고통으로 남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글을, 소설을 써 나가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허구의 소설을 통해 역설적으로 진실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에 다름 아니지 않을까. 단순히 진술로 세상의 면면을 기술하지 않고 남들이 보지 않는 후면을 바라보며 인간 내면의 이질적인 감정을 솎아내면서까지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일 거라고.
하지만 앞으로도 누군가 영감을 어떻게 얻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
그저 오래 생각한 어떤 것이 때로 글이 되었다는 말 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