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고객들을 대상으로 이색적인 공모전 이벤트를 개최하는데 뜻밖에도 내가 그 공모전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공모전의 이름은 ‘AI 쇼핑 명언 공모전’
그 온라인 쇼핑몰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고객의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 등을 분석, 최적의 쇼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맞춤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면을 다른 온라인 쇼핑몰과의 차별점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자사의 인공지능을 통한 개인 맞춤화 서비스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공모전 이벤트를 진행하는 취지였다.
이벤트의 주요 내용은 참가자가 해당 온라인 쇼핑몰의 챗봇 채널을 활용하고 협업해 개성 있는 쇼핑 명언을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었다. 참가자는 생성된 쇼핑 명언과 함께 AI 챗봇과 의견을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캡처해 첨부하면 응모가 완료되는 방식이었다. 대상 수상자에게는 쇼핑 포인트 100만 점을 증정한다고 했다. 자그마치 100만 점!
내가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소개가 되어 있었다.
‘본인 소설 언맨드가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흥미롭게 묘파했다는 점에서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만큼 그 의미를 살려 이번 AI 쇼핑 명언 공모전 심사를 맡는다.’
다가올 인공지능의 시대를 떠올리며 소설을 쓰기는 했지만, 이런 방식으로 대중과 AI와의 협업 결과물을 심사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약간의 당혹스러움이 없지는 않았다. 이벤트의 취지에 걸맞게 관련 분야의 소설을 쓴 소설가로서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내심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알아서 결과물을 생성하는 AI를 내가 무슨 수로 심사할 수 있을까 걱정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하더니 모르긴 해도 성능 좋은 AI가 나름 알아서 좋은 명언들을 생성해 줄 텐데 내가 그 우열을 제대로 가려낼 수 있을지 하는 의문도 차올랐다.
심사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응모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든 건 차라리 그 편이 더 속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 후였다. AI와 제법 신경 써서 만들어 낸 명언으로…… 급기야 대상을 수상하고 100만 포인트를 획득한 다음, 평소 사고 싶은 물건들을 이번 기회에 한꺼번에 사들이고…… 그런 상상이 머리 위로 몽실몽실 피어오르다가 일순간 모래알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어쨌든 현 상황에서 어떻게도 내가 공모전 이벤트에 응모할 길은 없다는 사실과, 심사위원을 포기하고 공모전에 응모해서 선정이 된다고 한들 개최 측에서 나를 순전히 좋게만 바라봐 주기나 할까, 그런 생각이 들고 나서였다.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사이 응모는 마감되고 결과 데이터가 내게 전달됐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공모전 이벤트에 응모한 모양이었다. 다소 막막한 심경에 휩싸여 있다가 조금씩 그 감정이 풀리기 시작한 건 응모한 사람들의 결과물을 하나씩 훑어보면서였다. 나도 그 내용에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한 거였다. 사람들이 이벤트에 응모할 목적으로 형식상 AI 챗봇을 이용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응모 내용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만족할 만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꽤 애쓴 흔적이 보였다. 재기 넘치고 재미있는 문구는 물론 하나의 브랜드 카피처럼 느껴지는 것도 있었다. 그쯤 되자 데이터를 하나도 빠짐없이 솎아보자는 결심이 들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AI 서비스를 받아들이는지 궁금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니까.
명언, 경구 같은 단순 문항을 만드는 내용 때문인지 중복되는 결과물이 많았다. 챗GPT도 그렇지만 AI에게 던지는 질문이 단순하고 보편적일 경우 기대 이상의 결과물이 생성되지는 않는다. 던져지는 질문이나 과제가 구체적이거나 특수할수록 그에 걸맞은 답변이 생성된다고 할까. 만약 AI를 사용하는 사람이 엇비슷한 고민이나 질문을 던진다면 대게 중복된 결과를 받아 들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아직까지는 그 결과 값이 창의적으로 도출되는 것보다 데이터에 의존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AI는 인간의 필요를 잘 읽어내는 듯하지만 인간의 속마음까지 읽어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다.
미래 사회에는 AI가 많은 직업을 대체할 거라는 예상에 토를 다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지목된 직업군의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이야말로 AI가 대체하지 못할 거라고 강변하는 듯하다. 모두가 AI에게 대체될 미래 사회를 우려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직업이 가장 먼저 그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소설가는 어떨까. 창작 영역에 있는 예술가를 AI가 대체하게 되는 일은 없을까. 한 예술가의 스타일을 이어받아 비슷한 복제본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AI 로봇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어느 날 누가 보기에도 기존 예술가의 것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예술적 성취가 담긴 결과물을 AI 로봇이 만들어 낸다면 그건 누구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원전부터 인류가 갑골에 새겨가며 표현한 이야기와 생각이 이어져 온 책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AI가 인간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대로 가상현실을 창출해 아예 텍스트를 사용해 쓴다는 행위를 대체한다면? 혹은 정보가 더 이상 책과 인터넷이 아니라 어떤 장치를 이용해 클라우드 형태의 플랫폼을 접속할 수 있고 바로 눈앞에 홀로그램 형태로 재현된다면? 나는 그게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시대에서 일어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가와 펼쳐질 일이라는 걸 담담히 받아들인다.
AI의 진화는 반대로 인간의 쓰임을 단순화한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기능을 퇴화시키고 그 기능성을 AI나 로봇이 대체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모든 것이 대체된다면 인간은 이 세계에 어떤 의미로 존재하게 될까. 박물관에서 인류 진화의 과정을 확인하는 것처럼 훗날 우리의 현재 모습도 박물관에 박제되는 것은 아닐까.
요즘처럼 인류가 가까운 공동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지구온난화와 이상기후 현상으로 인한 자연재해에서 자유로운 곳은 없다. 과학과 AI는 발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지구에서는 인간의 욕망들이 충돌하고 있다. 전쟁의 포화가 그늘을 드리우고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은 지구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역설적으로 지구의 나이는 늙어가는 것 같고 어딘가 모르게 전성기를 지나온 것 같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더 좋은 세상을 후대에 남겨주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그런 약속은 가능한 걸까.
AI와 협업해 쇼핑 명언을 만들기로 한 그 공모전 이벤트는 한 기업의 차별화된 AI 서비스를 대중에게 알리는 데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소비자가 쇼핑에 대한 고민이나 질문을 할 필요도 없이 AI가 착착 쇼핑을 해주는 시대가 오겠지. 그런 시대는 과연 편하기만 한 걸까. 문득 심사 말미에 그런 의문이 들었다. 다음에 이런 기회가 찾아온다면 꼭 심사 대신 응모를 해보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100만 포인트를 받으면 어디에 사용하면 좋을까. 그런 상상을 제멋대로 해보면서. 아무래도 그 편이 훨씬 더 나은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