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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기성 Dec 17. 2024

우리의 심연이 시간의 지평을
마주 바라볼 때

왜 소설을 읽는가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생각 속에 나라는 개체도 존재한다. 그런데 생각이 먼저일까, 존재가 먼저일까. 가끔 그런 물음이 들 때가 있다. 나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며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타인들은 어떤 존재인가. 만약 나의 죽음으로 생애가 닫힌다고 해도 이 세계와 다른 타인들은 그대로 남아 있는 걸까. 내가 없어도 이 세상은 그대로 존재하는 걸까. 내가 닫히면 이 세상도 닫히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지만 아무래도 알 방법은 없다. 그래서 삶을 한바탕 꿈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소설에 시간의 죽음이 깃들어져 있다고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인간은 시간을 살아가지만 그 시간의 문은 언젠가 닫히고 만다. 닫힐 문을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은 흔적을 남기는 방식으로 이어져 왔다. 그런 방식으로 인해 인간은 현재를 과거와 연결하고 미래를 예측하기도 했다. 삶이란 어쩌면 시간의 지평선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작은 배와 같은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풍랑에 위태롭게 흔들리기도 하고 가만히 멈춰 서있기도 하고 또 때로는 의지를 갖고 열심히 항해해 가지만, 언제나 매 순간 시간이라는 대가를 치러 내야 한다. 어떻게든 닫힌 시간의 문 앞에 당도하고 만다. 언제고 시간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지 모르기에 인간은 스스로의 흔적을 남겨 그곳에 있었음을 증거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시간은 이어져 왔지만 반대로 인간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내보이면서.      


소설은 인류의 삶에 녹아 있는 이런 삶의 방식과 형태를, 유한한 인간의 욕망과 갈등을, 존재의 비감함과 삶의 환희와 비참한 속성들을 때로는 비유적으로 혹은 우화적으로 또 때로는 사실적으로 접근해 그려내 왔다. 이야기를 통해 인간에게 드리운 시간의 한계와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지평선은 막막하고 끝이 없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성과 시간의 죽음은 소설이라는 형태 속에 잠겨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시간과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삶을 말하고 이야기하기에.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망각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폭력과 전쟁이 되풀이되는 역사는 망각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와 이념, 종교, 인종, 정치권력의 충돌과 대립 앞에서 개인은 희생을 요구받는다. 어떤 거대한 가치를 한 국가 혹은 정당이 독점하거나 권력화 하면서 개개인에게 이에 충성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폭력과 희생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소설은 때로 그 망각의 역사를 이야기의 형식으로 고발한다. 그런 면에서 소설가는 이 유한한 세계를, 시시때때로 인간을 착취하거나 도구로 삼으려는 빅 브라더를, 권력과 폭력의 대립 속에서 무너지는 한 개인을 응시하는 사람이다. 그와 같은 응시가 곧 소설의 내러티브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결국 현실의 어떤 면을 응시하고 있느냐와 같은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독자가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텍스트를 따라 읽으며 얻는 것은 작가의 응시에 의해 여과된 세계다. 작가의 응시는 현실을 향해 있지만, 그려진 소설은 허구의 세계다. 현실에 대한 응시가 응결된 실체의 형태로 허구의 인물들에게 알알이 박혀있는 것이다. 독자가 읽는다는 행위 그 자체로 그 세계에 속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세계로 인도하는 텍스트 안에서 작가가 응시하는 현실 세계와 교류할 수 있다.

       

독자는 텍스트로 그려진 세계를 단지 읽는 것만으로, 그 세계를 상상하고 이미지화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그런 방식이 원활하게 구동되도록 기능한다. 영화 혹은 영상 세계는 그 원작자가 이미 그려낸 세계를 관찰하거나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 텍스트로 범주화된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직접 그 세계를 자신만의 상상으로 그려낼 수 있다. 독자는 소설 속에서 그와 같은 상상의 자극을 통해 소설가와 그리고 현실과 교류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나 발자크가 깊은 통찰로 비춘 인간의 심연, 체호프의 시선 속에 담긴 삶의 모순, 밀란 쿤데라가 섬세하게 그려내고자 했던 인간 존재와 의미, 주머니 속의 동전들처럼 자잘한 인간의 욕망이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하나의 이야기, 소설을 통해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읽는 행위는 곧 타자의 응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독서가 다른 의미에서 타인의 쓰기를 받아들이는 행위라면 이미 읽는 행위 자체에 쓰기의 힘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텍스트를 읽어나가는 동시에 무엇을 쓰고 그리고자 하는 내적 충동이 맞부대끼는 과정이 독서의 총체라고도 할 수 있고, 바로 이것이 독서의 내밀함으로 연결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독자는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다. 무엇을 읽는다는 것은 닫힌 시간의 문으로 향하는 복도를 혼자 외따로이 걸어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소설은 우리의 마음을 깊은 심연으로 향하게 만든다. 깊은 심연으로 흐른 마음이 우리를 어떤 측면에서든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 준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깊은 심연이 현실 어딘가의 부당성에 대해, 인간성의 모순과 비합리를, 경제가치로 환원되는 인간의 조건을, 비루한 권력과 욕망이 개인에게 저지르는 억압과 폭력에 대해 생각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소설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개인적인 시선과 가치관으로 전유된다. 


그렇다면 소설은 매개가 될 뿐 주체가 될 수 없다. 소설은 개인에게 읽히는 방식에 따라 독자의 것이 되는 것이며, 바로 그 상태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소설은 그런 면에서 어떤 것도 지배하거나 사유화하는 위치에 있을 수 없고 오로지 앞서와 같은 방식으로 읽는 이에게, 타자에게 기여할 때만 존재성을 획득하게 된다. 말하자면 소설은 소설가에게든 독자에게든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고 다만 시간의 지평선 위에 병기된 현실과 인간의 좌표를 읽는 하나의 수단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읽는 행위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쓴다는 의미다. 쓰는 것은 현실을 읽는 것이고, 텍스트를 읽는 다는 것은 현실을 다시 쓰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남아 있을 유일한 거처는 결국 텍스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래가, 미래의 기술과 낙관이 언젠가 인간의 존재를 남루하게 만든다고 해도 결국 읽는다는 행위만큼은 우리가 사라진 그 자리에 영혼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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