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외 직업

첫 번째 카테고리 - 책상

by 조민성

귀농이 망설여지는 가장 큰 이유


작은 텃밭과 잘 가꾼 꽃밭, 아담한 크기의 경량식 목조주택, 하얀 개 한 마리와 넓은 잔디-


전원생활은 대개 상상 속에서 존재한다.



누구나 아침에 일어나 매캐하고 텁텁한 공기보단 서늘하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삶을 더 선호하겠지만 귀농으로의 선택은 쉽지 않다.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생각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그나마도 물어보면 현재의 생활을 포기하고 지방으로 내려가 어떻게 삶을 꾸려나갈지에 대해 막막해한다.



농업은 매출이 생긴다 해도 상당 부분이 다시 재투자로 들어가게 되며, 자급자족을 하며 버티지 않는 이상 수확까지 기다릴 생활비가 절대적으로 모자라다.



북적거리고 피곤하지만 도시 생활에서는 흔한 '일거리'가, 하다못해 '밥벌이'라도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이루어질까?




상속자, 로또 1등 당첨자, 한량


이 세 가지는 내가 종종 받는 오해들이자 내가 아직 이루지 못한 꿈들이다.


첫 번째 꿈은 아직 우리 어머니께서 더 분발하셔야 하고, 두 번째는 3등까진 해봤는데 일주일 만에 탕진했고,번째를 이루려면 아내가 좀 더 분발해야 한다.


옛날에 어머니를 따라가서 만났던 무당이 나더러 소처럼 열심히 일할 팔자라고 했었는데 '아니, 그럼 굶어 죽기 싫으면 일해야지'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는 일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고 엉성한 듯 지면 잠 못 자는 성격이라 일을 끝까지 해내야만 광합성이 된다.



모종 심어놨다고 수확철까지 시간 때우며 지낼 속은 없어서 강원도로 넘어오기 전부터 일거리들을 잔뜩 싸들고 왔더니 이게 지금 와서는 내 머리 위에서 아주 춤을 추고 뛰노는데 정말 아내부터 시작해서 처갓집 식구들까지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과로사로 쓰러졌을 것 같다.



종합해서, 시골에 일이 있을까 걱정된다면 일거리는 만들어오면 되는 부분이고 그 첫 단계는 책상 앞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번역


개인이나 업체를 통해 간간히 진행하는 번역일이 들어오는데 실제로 번역으로 돈을 받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지는 이미 12년이 넘었다.



처음 썼던 글은 어떤 한국 회사의 매뉴얼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는데 구역 별로 얼마씩 책정받은 후 실제로 내가 썼던 번역이 매뉴얼이 포함됐을 때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학교를 빼먹고 먼 도시까지 통역 일을 다니던 것에 비하면 집에서 할 수 있는, 비교적 몸은 편했던 일이지만 노동에 비해 수입이 짠 편이었고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폐해지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리 좋은 추억은 없다.



흔히 통역이나 번역처럼 외국어와 관련된 일은 세련돼 보인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실제로 들어가 보면 하루 종일 횡설수설 떠들어야 하거나 노트북 앞에 앉아 신경 줄을 태워야 하는 일이다.


외국어에 애정이 있는 사람은 한 단어씩 번역할 때마다 희열을 느낄 수도 있지만 한국사람이 한국어를 쓸 때마다 자신이 쓰는 언어 하나하나에 행복해하진 않는 것처럼 외국어를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사용해온 사람들에겐 그냥 육체와 정신노동의 일종이다.



하고 많은 언어들 중에서 영어는 한국어와 단어의 입체성이나 기본 정서가 다르기 때문에 가끔 어느 문장에서 턱 걸리면 한참을 질질 끌게 되는데, 전문직에 포함되긴 하는지라 실수는 곧 실업으로 이어진다.


통역이야 뱉고 나면 사라지니 그렇다 쳐도 번역은 실수가 박제되기 때문에 몇 페이지만 넘어가면 얼굴이 푸석푸석해진다.



가끔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영어로 작문을 시키면 번역기를 슬쩍슬쩍 돌리는데 그런 식으로 영어가 번역 가능하면 얼마나 돈 벌기 편했을까 싶어 참 귀엽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하다.



그래도 몇 가지 장점은 있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노트북만 있으면 어디서든, 심지어 여행을 하면서도 일 할 수 있고 몸이 죽도록 힘든 일은 아니기 때문에 날씨가 너무 춥거나 더울 때 집안에 틀어박혀 일하기 좋은 핑곗거리다.



운이 좋아 비슷한 장르의 일감이 들어오면 번역 정서가 비슷해서인지 조금 더 빨리 써지는 장점도 있다.



가장 거슬리는 단점으로 유독 힘든 번역물을 끝내고 나면 영혼까지 하얗게 타버려 한동안 약간의 우울감과 무기력이 찾아오는데 결국 본업이 있는 상황에서는 조금 위험한 단점이다.


나도 원하기만 하면 어지간히 책상 앞에 오래 앉아있는 성격인데 정말 장점 말고는 단점밖에 없는 일이다.




문서 수정


이쪽 카테고리의 일로는 가장 내 성격에 맞는 일이 아닌가 싶다.


중요한 발표문이나 회사 관련 서류, 이력서, 도면, 창작 글 등의 수정인데 이미 다 만들어진 모양을 다듬는 정도인 데다 창작보다는 이쪽에 더 재능이 있는지 같은 시간 동안 하는 번역보다 수입도 더 괜찮고 체력 소모도 덜하다.



간간히 글처럼 생긴 똥이 들어올 때면 수정이 아니라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필 수준의 대공사가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골조가 이미 짜여 있는 상태라 그런지 훨씬 편하다.


예전 회사에서 하던 일들과 관련된 서류들은 죽어라 야근해가며 내 목을 조르던 것도 모자라 급기야 일 년간 내 머리에 크고 작은 땜빵을 남겼었던 업무들이기 때문에 들어오면 치가 떨리지만 이내 기계적으로 하게 된다.



사람 습관이 참 무서운 게 잊고 있던 공식들이나 단축키, 단위 계산 등이 자동적으로 떠올라 움직이는 내 손을 보고 있으면 내가 아닌 것 같다. 심지어 점점 는다.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대개 이런 요청은 급한 상황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기한이 조금 촉박한 편인데 이게 두 개 이상 겹쳐서 들어오면 다급한 사람(이나 단체) 둘을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조심해야 하는 점이라면 내 취향보다는 결국 일을 맡긴 사람의 취향에 맞춰야 하는 건데 이게 어찌 보면 굉장히 편하기도 하면서 가끔 아주 작은 한 조각에서 서로 의견이 안 맞아 꼬일 때가 있다.


중요한 건 이런 일의 경우에는 내가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포지션이 아니기 때문에 최대한 괜찮은 옵션 몇 개만 제공한 후에 결정권에서는 한발 물러서는 편이 서로 편하다.




교육 자료 작성


가드닝이나 농업에 관련해서 교육자료를 작성하는 일이 가끔 들어오는데 개인적으로는 정말 보람을 느끼고 좋아하는 일이지만 다 쓰고 나면 '정말 이렇게 써야 했나'하는 회의감을 자주 느끼는 장르다.



예전에 만들어놓은 자료들 중 적합한 자료가 있으면 그대로 보내도 되겠지만 조금이라도 새로운 부분이 생겼다거나 수정이 필요한 부분도 더러 생기기 때문에 요청을 받을 때마다 며칠 잡고 수정을 거쳐 내보낸다.


교육 주제나 대상에 따라 꽃에 물 주는 이야기가 서너 줄에서 서너 장까지 널뛰기도 하고 농업을 장려했다가도 회의적으로 보기도 하는 등 한 가지에 대한 지식도 보는 시각에 따라 참 여러 가지로 바뀐다는 걸 깨닫는다.



그러다 보니 제출 후에도 혼자 자료를 새로 다시 만들어보고 그게 더 나은 것 같으면 수정본을 보내기도 하는데 결국 글로만 담는 지식의 한계를 느끼고 돌아서 여러 가지 생각을 다시 하게 만든다.


번역물은 끝이 정해져 있지만 이 경우에는 끝을 내가 정하는 데다 개인적인 욕심이 섞이면서 힘든 것 같다.




저강도 저소득 저활력


여기까지는 꼭 시골이 아니더라도 거래처가 있고 책상과 노트북 앞에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조건만 맞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들인 데다 사실 농업이랑 큰 관련 없는 일들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굳이 농사랑 연결 짓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들이라 가끔 농업에 관련된 일들 때문에 정신과 육체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아예 상관없는 이런 일들이 반가울 때도 많다.



육체적인 일에 자신이 없거나 그렇게까지 고된 노동을 하고 싶지 않고, 농사도 소규모의 취미 정도로만 유지하며 전원생활을 하고 싶다, 내지는 그냥 몸만 시골에 있고 싶을 뿐이다,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수 있다.


능력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순 있겠지만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내가 일하면 하루에 십만 원 초반대 정도의 수입이 나오는 것 같다.


들어가는 시간과 스트레스에 비해 그리 크다고는 할 수 없는 수입이지만 자신의 생활만 검소하게 유지하며 산다고 하면 크게 문제없는 수입인데 그 선을 넘어가면 언젠가는 사리를 얻을 것 같다.



어쩌면 이미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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