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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성 Dec 30. 2019

정원은 예술일까?

한국 사람들은 예술을 좋아한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집집마다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씩은 있었다.


모셔놓고 얼마나 안쳤는지, 건반 한두 개씩은 꼭 조율이 나간 상태 거나 장식품 거치대로 사용되던 경우가 태반이었지만 그래도 있었다.



조금 더 나가면 바이올린이 있는 집도 심심찮게 있었고 미술학원에서 그려온 그림을 걸어놓은 액자라거나 도복을 입고 찍은 액자, 과연 몇 번이나 바늘이 닿았을까 싶은 클래식 LP판 세트와 전축, 직접 쓴 서예라던가 직접 그린 수묵화, 직접 만든 도자기 등등 가는 집집마다 예술가 한 명씩은 사는 집 같았다.


물론 그때가 물질적으로나 감성적으로 풍요로웠다고 기억하는 90년대 중후반, IMF 직전까지의 기억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2010년 이후 내가 직장생활을 하던 때에도 다들 술 한잔만 걸치면 노래방으로 몰려가 마이크를 집어삼킬 듯 밤새 노래를 불러대곤 했다.



해마다 여러 방송사에서 열리는 오디션 프로그램엔 '과연 일반인이 저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수준 있는 참가자들이 무더기로 나왔다 경쟁에서 밀려 우수수 떨어진다.


미국에서의 'Good job'이나 영국의 'Well done'이 한국에서는 '예술이야'라는 말로 번역하면 딱 정서가 맞을 것 같다.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전시회나 뮤지컬 등의 공연을 보러 가곤 했는데 밖에 나가는 취미가 없던 나는(가드닝은 내 기준에서 내부의 일이다) 매번 꽉꽉 들어찬 홀을 보며 '이 사람들은 직접 와서 보는 것마저 좋아하는구나' 싶어 낯설어하고 또 감탄했다.



예술에 관해선 끼도 많고 열정도 많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긴다.


내가 봐왔던 한국사람들은 그랬다.




사실은 나도-


이렇게 딴사람들 얘기하듯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가뜩이나 좁은 방구석에 LP판이나 CD를 모으는 인간이다.



방이 좁아진 이유도 애초에 언제 읽을지 모르는 책들을 쌓아놨기 때문인데 집에 있는 책들을 대략 계산해보면 하루 종일 책만 읽고 있어도 다 읽는데 20년 이상 걸리는 걸로 추측된다.



심지어 어떤 책들은 사놓고 10년 넘게 안 읽어서 차라리 냄비받침으로 쓰는 게 더 가치 있지 않을까 싶다.



집에서 혼자 어설프게 그림을 그리고 집사람의 미술 교습소를 점령한 요즘은 교습소에 걸린 그림들을 천천히 둘러보는 걸 좋아한다. 



대학 시절에는 집에 있는 피아노를 이른 아침부터 두들기다 이웃과 싸우기 일상이었고 곡 쓴다고 사양 낮은 노트북에 무거운 미디 프로그램을 까는 바람에 굼벵이로 만들어버려 정작 리포트 작업은 꼭 남의 노트북을 빌려서 해야만 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밴드 활동한답시고 몇 년 동안 회사 사람들 모르게 합주에 공연도 하고 월급 모아 비싼 기타도 샀었는데, 그때 같이 했었던 내 친구가 얼마 전 중국 공연도 다녀오는 동안 그 기타는 무대 한번 못 올라보고 봉인된 상태다.



어린 시절 그 흔하던 업라이트 피아노는 우리 집에도 당연히 있었고 한때 학원을 몇 개 운영하셨던 어머니 덕에 학원에 가면 음악이던 미술이던 마음대로 배울 수 있었던 시기도 있었다. 



지인의 절반 이상이 음악이나 미술과 관련 있는 사람들에, 하루 대부분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다니고, 요즘도 한 달에 한두 번은 전자피아노 가격을 알아보고 있는 나를 보면 가끔 어디까지가 취미인지 잘 모르겠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은데 예전에 어머니 말씀 마따나 내가 그림 그리고 악기와 노래 연습하던 시간에 공부를 했더라면 학위가 한두 개 더 있었을 것 같다.


나도 근본은 한국사람이 맞긴 한가보다.




예술은 평가될 수 있을까?


난 한 번도 예술을 진지하게 취미 이상으로 해본 적도 없고 그 이상의 실력을 갖출 각오도 없어 취미로만 남겼지만 정말 싫어하는 말이 하나 있다.


'예술은 평가할 수 없다.'


이 말을 정말 싫어한다.



물론 예술이나 그 비슷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도 저마다 가치관이 달라서 딱 잘라 얘기할 순 없는데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람 손으로 만든 걸 사람이 평가할 수 없다면 대체 누가 평가할 수 있을까 싶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상상력이 있고 감각은 있지만 모두가 그걸 구현화시킬 수 있을 만큼의 기술을 갖추고 있진 않을 뿐, 작품을 접했을 때 취향은 당연히 갈릴 수 있지만 완성도나 숙련도는 어지간히 귀가 있고 눈이 있으면 감각적으로 알 수 있다.


다만 듣기 좋은 음악이나 감동을 주는 그림이 꼭 완성도와 숙련도로 결정되는 건 아니기 때문에 결과물의 좋고 나쁨을 함부로 단정 짓긴 힘들 뿐이다. 



사람들은 완성도가 높고 시간과 숙련도도 느껴지지만 좋다는 느낌을 못주는 작품에 대해 보통 '아쉽다'라고 표현하는데 감동도 없고 기술도 떨어지는 결과물에 대해서는 매몰차게 혹평한다.


직접 만들어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쉽게 훑고 지나가며 뱉는 말은 창작자에게 큰 상처가 되지만, 이때 자칫 예술이라는 단어를 단지 혹평에 대한 방패로 쓸 때 사람들은 한술 더 떠 대번에 "예술가 납셨네"라는 말과 함께 침까지 뱉는다.


'느낌'이라는 단어가 참 애매한 단어이긴 하지만, 인간의 오감은 인간 스스로가 인지할 수 있는 이상의 성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외한이라도 지나가며 쓱 훑고 무의식 중에 휙 받는 느낌이 대개 맞는 경우가 많다.


이때의 평가를 바꿔보려고 구차해질수록 사람들은 '방구석 예술가'라는 딱지를 붙여버린다. 



비유가 좀 이상하지만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야생의 호랑이랑 굳이 머리채 잡고 싸워보지 않아도 직접 만나보면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진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고 심지어 지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본능적으로 안다.


누군가 피가 나게 노력해서 호랑이를 쓰러뜨린다 해도 알아주는 이는 거의 없다.


오히려 사람들은 호랑이와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이 티비에 감동적으로 나오면 더 좋아할까-




정원은 예술일까?


말이 조금 돌아왔는데 예술은 평가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평가 되어진다.



흔히 작품을 말하는 예술이 아닌 원래 예술의 예藝는 인간의 재주, 즉 인간이 부리는 기능이나 기술을 뜻한다.


감동이나 느낌이라는 부분이 종종 상대적이고 주관적일 수는 있지만 매출액이나 순위, 팬의 숫자 등 객관적으로 평가할 잣대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고로 예술이라는 단어는 방패로 치면 구멍이 숭숭 뚫린 방패인데, 찬사로서의 예술은 최고의 찬사가 되겠지만 변명으로서의 예술은 구차하고 비참해진다.



가드닝 역시 종종 예술로 표현되거나 예술이라 주장되곤 한다.


가드닝(Gardening)이라는 말은 한국말로 직역하면 말 그대로 그냥 '정원질'인데 예술을 좋아하는 한국사람들은 여기에도 원예라고 이름 붙였다.


혼자 속 편히 하는 정원질에 좋고 나쁨은 존재하지 않지만 여기에 예술이라는 옷을 입히는 순간 도마 위에 올라가고 정원의 주인은 창작자가 돼버린다.



가능하다면 칭찬만 듣고 싶은 것이, 하다못해 속상한 소리까진 듣고 싶지 않은 게 창작자의 마음이겠지만 도마 위에 오른 순간부터 사람들이 돋보기를 들고 바라본다.


백번의 칭찬보다 한 번의 아쉬움을 기억하는 게 사람 마음이라는데 과연 사람들이 떠난 후 홀로 정원에 남는 창작자는 어떤 기분일까?


주변에 창작활동을 이어나가는 지인들을 보면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만 든다.



난 상상만 해도 끔찍하던데-




정원과 건축 그리고 예술


건축은 시대의 과학 기술과 예술성, 스케일을 대차게 보여주는 분야다.


가드닝이나 조경은 건축의 하위 카테고리로 들어가는데 건축물이 예술로 인식된지는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유명인사들은 예술가이자 동시에 기술자이고 건축가였다.


흔히 알려진 가우디의 건축물들은 근대에 배출된 창작물들 중 가장 유명한 예술품들 중 하나라고 해도 딱히 반박할 영양가가 없다.



다만 건물이나 시설의 건축과 가드닝&조경은 성격이 굉장히 다르다.


건물이나 시설은 간단하게 중력으로부터 시작해 그 건축물을 이용하는 사람 또는 장비들의 하중과 힘의 방향 등을 감안해 구조와 용도를 계산하고 인간의 생활과 사회에 연결시킨다.



하지만 일정 소규모의 가드닝이던 영국식 빅 가든이던 정원을 만드는 작업은 가든 내에 존재하는 생태와 기후, 환경, 지형 등을 고려한 후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디자인을 잡아나가면서 인간 생활과 사회에 연결시킨다.



건축물은 자연을 이용하지만 조경은 자연을 창조한다.


이를 잘못 혼용하면 의미도 없이 원시 시대로 회귀하는 건축물이 되거나, 생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름만 정원이 된다.


그리고 건축에서의 기술적인 실수는 그 피해가 창작자가 아닌, 후에 그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본질에 대한 이해와 기술이 빠진 건축물을 우리는 흉물이라고 부른다.


똑같은 것이 빠진 작품에는 먼지만 쌓인다.


욕도 쌓인다.



어떤 미사여구로 꾸민 의미를 담더라도 구체화되고 거기에 예술이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부터 사람들에게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일정 이상의 테크닉과 본질에 대한 이해도가 요구된다.




조경 도면


조경 공사 현장에 가보면 대부분 도면이 CAD로 그려져 있는데 정원의 모습이 2차원 평면 위에 1차원의 선으로 그려져 있다.



난 개인적으로 CAD 프로그램을 좋아하는데 아직 홀로그램이 상용화된 것도 아니고 양식을 간소화하면 일반적인 건설현장에서는 CAD 만큼 상용화된 포맷이 없으니 여기까진 불만이 없다.



선으로 표현했지만 가끔 어떻게 CAD로 이렇게 그렸지 싶을 정도로 잘 그린 그림도 있고 현장에 식재되는 화목의 설명도 꼼꼼히 쓴 도면들도 많다.



다만 이 도면이 조금만 더 실제 현장에 대한 이해도가 있었다면, 단순히 경사면을 깎고 석축을 세우기 전의 지형과 환경을 살렸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때가 많다.


아무리 A3 사이즈에 최적화된 평면도 상이라도 그려지기 전부터 조금 더 치밀한 계산과 디테일한 설명이 가능했을 텐데 싶지만 사실 국내 건축계에서 설계는 페이가 가장 보장되지 않는 종목이기 때문에 일정 이상의 투자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백날 열심히 조사해서 현장 맞춤형으로 3D 도면을 만들어봐야 돈 못 받는 게 일반적인 설계 사무소의 현실이다.



요지는 현장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조경 도면을 참고해서 가드닝 디자인을 잡고 예술이라고 이름 붙이면 나중에 뒤통수 세게 맞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선택


자신의 가드닝을 예술이라고 하는 사람을 만났다.


여러 의미로 대단했다.



플라워 워크처럼 단발성으로 꽃만을 이용해 만드는 창작물은 잘 모르겠지만 가드닝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또 스스로 변화하는 공간이다.



서울에 사는 동안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흉물로 끝난 건축물들을 많이 봤었는데 내 실력으로는 그 정도도 못 만들 것 같았다.


일반적인 건축만 해도 따라야 할 규칙들이 얼마나 많은데 거기다가 예술이라는 옷까지 입히려니, 생각만 해도 묵직하다.



현재의 내 가드닝은 스스로 생각에 '숲에 기생하는 일'이고 또 그게 현실이다.


나의 음악이 그랬듯 내 가드닝은 그냥 안전하게 매뉴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천천히 쌓아가는데서 만족을 느낀다.



짧은 일생을 예술에 둘러싸여 지냈지만 선택해본 적은 없다.


가드닝을 기술로 남길지 예술로 남길지는 선택의 문제이지만 예술은 여러모로 참 용기가 필요한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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