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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성 Dec 18. 2019

숲 속 여포, 인간 고자

현장에 있을 때였다.


현장 준공일이 코앞으로 다가와 내부 인테리어 작업자들이 모두 서두를 때였는데 하필이면 같은 층으로 모든 작업이 겹쳐버렸다.



방마다 작업자가 서너 명씩은 들어차 각기 다른 작업을 해대니 서로 만들어내는 작업 폐기물에 자재가 섞이고 엉망이었다.


이렇게 나가다간 결국 다 같이 느려지고 현장 인건비의 손실은 물론 준공날짜에 맞추지 못할 것 같았다.


층별 작업 현황 리스트를 만들고 있던 나는 소장님의 다급한 소환에 청소기와 송풍기를 들고 그 혼돈의 층으로 향했다.




"두 시간 내로 정리해야 돼."


소장님께서 온화한 심성을 가지신 분이라 두 시간이라고 말씀하셨지 내 눈에 그곳은 당장 2초 안에 정리되어야 하는 디스토피아였다.


"최대한 빨리 해볼게요."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루 몇백만 원씩 잡아먹는 인테리어 작업들이 몇만 원 되지도 않는 청소 작업을 못해서 그 지경이 되다니.


먼지 먹는 건 질색이지만 어차피 할 일이면 빨리 끝내고 싶었고 당장 현장에서 그 사태를 가장 빨리 정리할 수 있는 사람도 나밖에 없었다.




"박 씨 붙여줄 테니 박 씨랑 같이해."


현장에 박 씨라는 아재가 있었다.


흔히 현장에서 특수요원이라고 불리는 아저씬데 약간 동네 모질이 아재 같은 느낌으로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당최 보이질 않다가 커피 마실 시간이 되면 귀신같이 자리를 잡은 채 한잔 때리고 있다.



그 아재의 주 업무는 평소 현장 내부를 돌아다니며 건설 폐기물들을 야적장에 옮겨 놓는 일로 사실 상  아사리판을 만든 주원인이기도 했다.


"그냥 혼자 하면 안 될까요?"


오며 가며 그 아저씨가 일하는 걸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나랑은 다른 종류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다.


같이 일하면 내가 복장이 터지던 그 아저씨가 나한테 터지던 둘 중 하나는 터질 것 같았다.


"그냥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잘 구슬려서 빨리 끝내는 것만 생각해."


사형선고를 받는 기분이었다.




결과는 뻔했다.


10분 동안 세 번은 사라지는 데다 당장 한 번에 실어 빨리 치워야 되는 자재들을 한 땀 한 땀 자루에 담고 있는 걸 본 나는 급기야 박 씨 아저씨를 슬슬 보채기 시작했고, 은근히 고집 있는 그 아저씨의 짜증 섞인 말투는 어느 정도 차있던 기름에 불을 지폈다.



결국 작업 내내 박 씨 아저씨는 내가 안보이는 곳으로 평화를 찾아 숨어 다녔고 나는 혼자 작업을 끝낸 뒤 씩씩거리며 다시 내 일을 하러 갔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본 소장님께서는 박 씨 아저씨에게 오후부터 다른 일을 맡겼는데 어떻게 구슬렸는지는 몰라도 아저씨는 오후에 몇 번이나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소장님께 씩씩하게 작업 보고를 했다.


'3층에 있던 자재들 창고에 넣어놨다.', '몇 호실 바닥을 물청소했다.' 같은 소소한 보고였는데 그때마다 소장님께서 어찌나 칭찬해주시던지 으쓱으쓱 해하는 박 씨 아저씨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소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짬밥에서 나오는 바이브라는 게 진짜 있구나, 나는 참 인간이 덜 됐구나 등등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서 어느 쪽이 좋은 거예요?"


이야기가 끝난 후 골똘히 생각하던 학생이 물었다.



"그런 게 어딨어 그냥 그렇게 하루가 가는 거지."


"그럼 그 박 씨라는 사람은 계속 현장에 있는 거예요?"


"오늘도 일하고 있었을걸?"


"어떻게 그래요?"


학생의 상상 속 박 씨 아저씨는 이미 현장 빌런이었다. 


"웃긴 게 박 씨 없어지면 새로운 박 씨가 생겨난다니까? 박 씨 입장에서는 내가 없어지면 새로운 조민성이 나타나는 거야. 그리고 어느 현장을 가나 소장은 있지."


"소장님은 선생님 같은 사람을 더 좋아하지 않아요?"


"그렇게까지는 감정이입 안한걸? 그냥 필요한 곳에 필요한 사람 쓰는 거야."


학생은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하는 사람이 열명 있으면 그중에 한 명만 팀장이 되고, 그 팀장 열명 중에 한 명만 관리자가 되고, 그렇게 열명 중에 한 명만 소장되고, 또 그렇게 열명 모이면 한 명만 사장되고, 뭐 그런 식이야. 소장 정도 되면 그렇게 자잘한 것까진 신경 못써."


"선생님 성격 같으면 그런 사람 바로 자르지 않아요?"


"그렇지. 그래서 내가 아직 소장을 못하는 거야."





숲 속의 대영제국.


지형이 다른 농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쓸만한 환경을 찾고 거기에 맞는 꽃을 심을 때면 지구 한 바퀴 곳곳에 유니언 잭을 꽂고 다니던 빅토리아 여제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여러 나무들이 있고 참나무끼리도 종이 나뉘며 지형에 따라 온습도나 토질도 다른데 나는 오랫동안 보고 생각하고 끈기 있게 기다린다.


하루 동안 해가 얼마나 들어오나 보기 위해 1년을 지켜보고 있는 자리도 있다. 



조금 이상한 나무나 지형, 잡초 군락이 있어도 결과적으로 내가 꽃을 심으려는 자리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일절 손대지 않는다.


오래도록 자라고 있는 나무들과 참나무들이 떨어트리는 낙엽, 계곡에서 나오는 물길은 내가 가로챌 수 있는 일종의 세금 같은 개념이지만 이걸 기존에 유지되고 있는 환경과 미생물들을 위해 남겨둘 때 토양이 더 살아나고 결과적으로 내 꽃들이 더 잘 자란다. 



중간에 어떤 식으로든 수명이 다한 나무들은 내가 손대지 않아도 자연히 버섯균들의 의해 천천히 가벼워지다가 종래에는 분해되기 딱 좋은 무게감으로 바닥에 쓰러져 다른 나무들을 키운다.


숲의 관리자를 자처하며 바쁜 듯 돌아다니지만 이 생태계 안에서 나는 생산활동이라곤 없는 철저한 소비자로서 기생하고 또 군림한다. 



하지만 작은 군주의 역할도 언젠가 끝나고 그 후엔 나도 숲의 일부로 돌아간다는 걸 알고 있다.


만약 그때도 이 숲이 남아있다면 그때는 또 다른 사람이, 어쩌면 내 이름을 물려받은 누군가가 지금의 내 역할을 맡고 있을 테지.


역할과 비율이란 건 희한하게 계속 유지된다.




인간 세상 고자.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건지 왕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있다 인간 세상으로 나온 나는 딱딱한 바닥으로 뚝 떨어지는 기분인데 생각도 항상 그 정도에  막혀있다.



가족들과의 사소한 말다툼, 내 인생의 절반도 안 되는 학생들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 내 인생의 두배가 넘는 사람들과의 3중 추돌 사고, 개똥이 쌓인 마당과 비우지 못한 재활용 쓰레기통 등등.


바쁘다는 핑계로 며칠 째 탁자 위에 쌓인 과일 껍질들을 보면 갖다 버릴 생각은 안 하고 나는 왜 이렇게 불편한 생물로 태어났는가 한탄부터 한다.



숲 속에서는 나무 밑동만 대충 봐도 나무의 상태를 알 수 있었는데 사람들은 어찌나 시시각각 변하는지 매일 보는 사람도 오전 오후가 다르다.


영화 '브룩클린 브라더스'라는 영화의 주인공 짐은 인간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할 것 같았던 별종이었는데 그가 괴팍한 할아버지의 집에서 용케 붙어살고 있는 이유는 오직 할아버지만이 그가 같은 집에 붙어살 수 있게 허락해준다는 이유 하나였다.



어쩌면 박 씨 아저씨와 소장님도 비슷한 관계일까, 아니면 나와 숲이 그런 관계일까-


올 한 해 동안 밤도 여러 번 새우며 일했고 새로운 얼굴을 수백 명 만났지만 사람 대하는 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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