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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성 Dec 13. 2019

유럽식 꽃 이름 찾기

유럽식 꽃 이름.


해마다 구근 식물들의 이름을 정리할 때면 고민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이름과 그 설명에 대한 부분이다.


수선화나 튤립, 백합, 아이리스 등 전통 있고 품종 개량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꽃들은 굳이 더 이상 자신의 고유한 이름(Last Name)은 쓰지 않고, 새롭게 받은 이름(First Name)만 가진채 시장에 나온다.



'이름에 대한 설명까지 쓸까, 그냥 정확한 품종명만 쓰고 끝낼까....'


'라틴식으로 발음하면 구릴까? 영어식으로 써놓아야 조금 더 세련되게 읽히려나?' 



사실 모든 이름들이 다 휘황찬란한 설명이 붙는 건 아니라서 편차가 심해지진 않을까, 행여 그것 때문에 선입견을 주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고, 어떤 이름들은 설명하기 너무 초라해서 차라리 언급하지 않는 게 나을 때도 있다. 



꽃의 특성을 살려 지어진 이름들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그럴싸한 이름들이지만 어떤 이름들은 정말 입에서 감탄이 나올 만큼 절묘하게 지어진 이름들도 많다.


비록 아쉬운 이름들도, 거창한 설명에 비해 꽃이 초라하기도 하지만 어찌 됐건 이름이라는 건 어느 하나도 허투루 지어지는 건 없다.


유럽에서 짓는 꽃의 이름들은 특히 더 그렇다.




유럽에서 꽃의 이름은 어떻게 지어질까?


유럽에서 꽃은 자연의 산물이자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극, 결정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오죽하면 영국에서는 주식인 밀가루에게 꽃과 똑같은 발음의 이름 'Flour'를 붙였었는데, 우리나라 정서로는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영어에서 주인이나 신을 뜻하는 'Lord'나 귀족 여성을 뜻하던 'Lady'조차 빵을 뜻하는 'loaf'에서 왔다고 하니 밀가루던 꽃이던 둘 다 대우받는 지위에 있던 단어인 건 분명하다.


이 정도 지위를 지닌 자연의 산물에게 유럽의 문화권은 오래전부터 신화 속 신들의 이름이나 역대 유명인사들의 이름, 혹은 상징적인 이름을 붙여왔다.



최근에 만들어진 품종에는 산뜻하고 모던한 이름을 가볍게 붙이는 경우도 많아졌지만, 클래식 품종일수록 라틴어 어원에 가까운 이름을 붙인다는 건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자부심을 가진 유럽인들이 해줄 수 있는 그 꽃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수선화 탈리아(Thalia)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 속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희극과 목동들의 시를 맡던 뮤즈의 이름으로 '꽃을 피우다'라는 뜻 역시 가지고 있다.


크지도 작지도 않게 산뜻하고 가벼운 꽃, 여리여리한 꽃대는 가녀린 여신의 모습 그대로 청초하고 첫 내음에 향기로운 듯하다가 이내 방귀 냄새 비슷한 냄새로 변하는 꽃향기는 묘하게 희극적이다.



정말 향기까지 계산하고 지은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참 절묘한 이름처럼 느껴진다.


'빛', '찬란함', '광휘'를 뜻하는 히브리어 어원의 지바(Ziva)는 백색의 다화성 수선화들을 뜻하는 Paperwhite의 품종으로 12월에서 1월이면 별을 닮은 작은 꽃들이 다발로 피어난다.



늦은 밤까지 작업을 하다 어두운 창문 밖을 배경으로 탁자 위에 피어있는 이 꽃을 볼 때면, 매년 보는 꽃인데도 감동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다만 그 향기만은 창 밖에 머물렀으면 좋겠다.


탈리아의 향이 방귀라면 지바의 향은 찬란한 똥냄새의 향연이다.



영어식 이름.


기본적으로 라틴어에 뿌리를 둔 유럽식 이름들은 대개 비슷해 보이지만 별 것 아닌 이유로 확 달라지기도 한다.


영어는 유럽어 중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는 언어이다 보니 새로운 품종 명이 결국 영어로 정해지는(혹은 번역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사람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느낌과 매칭이 잘 안될 때가 있다.



일종의 정서 차이에서 오는 갭인데 예를 들자면 스테인리스(Stainless)라는 수선화가 있다.


이 꽃의 이름은 필시 녹(stain)이 슬지 않을(less) 만큼 깨끗한 색과 화형을 지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일 테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름을 그렇게 지어놓으니 괜히 볼 때마다 '스뎅' 숟가락이 생각난다.  



오렌지 색 튤립 오렌지 주스(Orange Juice)처럼 항상 직관적인 이름만 지을 순 없나 보다. 



때로는 정말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애매한 이름이 있는데 의외로 많이 알려진 수선화 중 아이스 폴리스(Ice follies)라는 품종이 있다.


계란 프라이 노른자 같은 중앙의 노란 컵은 시간이 갈수록 퇴색되다 종래에는 아예 하얀색으로 변하는데 만개하는 시점을 지나 서서히 퇴색되는 그 색이 생기를 잃어 유독 더 icy 하게 보인다.



여기까진 참 잘 지은 이름 같지만 바로 그 뒤, Follies의 단수형은 Folly라는 단어로 멍청이와 가짜 장식을 말한다.


얼음 멍청이. 공갈 얼음 장식.



얘네와 흔히 같이 심는 겹꽃의 이름은 얼음 왕(Ice King).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설명도 참 많다.




내 드래곤과 달의 드래곤, 드래곤이 사는 산.


조금 올드한 표현이긴 하지만 90년대에 프랑스식 애정표현인 Mon Cheri(몽 셰리)가 유행했던 적 있다.


 프랑스어에서 Mon은 '나의', Cheri는 '꿀', '달콤함', '사랑' 등의 뜻으로 느끼하고 낯 두꺼운 프랑스인들이 딱 좋아할 만한 표현이다.



수선화 중 Mondragon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내 드래곤이라는 자칫 허언스러운 표현이 되고, 영어식으로 'Moon'의 줄임말로 읽으면 달의 드래곤이라는 몽환적인 이름이 돼서 마음에 들지만 실제로는 프랑스와 스페인에 있는 지명의 이름으로 산을 뜻하는 mon, 드래곤이 사는 산(Mon Dragon)이라는 뜻이다. 



'내 드래곤'처럼 조금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이름이라면 모르겠지만 '달의 드래곤' 정도면 역사가 긴 수선화의 이름 치고는 그럴싸해서 어떤 뜻이 맞는지 짐작하기 어려워진다.



이건 영국, 조금 더 정확히 하자면 '브리튼 섬'이 가지는 지리적, 역사적 특성으로 언어에 고대 켈트어와 스칸디나비아의 게르만어, 중세 프랑스어가 뒤섞여, 다른 유럽어를 역으로 한두 개 정도 더 알고 있지 않으면 어원을 헷갈리기 때문이다.




수확의 계절과 추분의 보름달.


프랑스나 스페인처럼 달이라는 단어로 라틴어 어원의 'Luna', 'Lune' 등을 쓴다면 좋겠지만 영국은 그 오랜 시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놓고도 'Moon'이라는 고유명사를 써서 읽는 사람을 헷갈리게 한다. 



이 Moon이라는 단어는 달을 뜻하는 고대 게르만어 'Menon'에서 온 단어로 이 단어의 어원은 의외로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는 '멘스'라는 단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달은 하늘에 떠있는 그 달을 말하기도 하고 합성어에 으레 쓰듯 Mon으로 바꾼 뒤 순서를 뜻하는 th를 붙여 보름달이 완전히 사라졌다가 다시 차는 한 주기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합성어는 월요일을 뜻하는 Monday에도 똑같이 들어가며, 라틴어보다는 북유럽 게르만어의 영향이 아직까지 많이 남은 요일 개념에서 가장 이상한 단어 Wednesday와 Thursday는 각각 'Odin's day'와 'Thor's day', 어벤저스 이후로 이제 한국에서도 유명해진 북유럽 신들 오딘과 토르의 날을 말한다. 


전쟁과 전투가 일상이던 그 시절 그 민족에게 정복과 평화, 천둥을 상징하던 신들은 지금의 연예인 만큼 인기를 누렸을테니까.



오리엔탈 양귀비의 품종 중 'Harvest Moon'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밝은 오렌지 색 꽃이 크게 열려 언뜻 봐도 그 이름은 농부들이 달빛을 받으며 일할 수 있었을 만큼 컸다는 추분(9월 말 경, 낮과 밤의 주기가 같아진다는 절기 중 하나)의 보름달을 뜻하는 이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왜 그랬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그 Moon을 별 이름이 아닌 시간으로 알아들었던 나는 벌판 가득 핀 오렌지 색의 축제를 보며 항상 수확의 계절을 떠올렸었다.


그때의 난 그 크고 동그란 꽃들을 보면서도 그 이름이 보름달이라는 생각을 단 1초도 안 했었다.



이름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


이름이라는 게 지어지면 인식도 그 틀 안에 가두어버리니.




왕대가리


내가 가장 좋아하는 튤립 중 항상 세 번째 정도 들어가는 튤립이 있는데 이름이 '빅 치프(Big Chief)'라고 하는 레드 톤의 튤립이다. 



단순히 빨간색이 아니라 하얀색에서 실크 질감을 살려 그라데이션으로 색이 입혀진 모습은 마치 얇고 부드러운 천을 하나 씌운 듯 신비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키가 큰 품종으로 일반 원예종 튤립들이 30cm가량 자라는데 반해 Big Chief는 40cm 이상 자라 야외에만 꽃을 심어야 하는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맞춤형 조경 품종이다.



여기서 Chief라는 단어는 중세 프랑스어에서 왔지만 셰프라고 읽히는 프랑스식 Ch 발음과는 달리 Chief는 영어식 그대로 치프라고 읽으며 뜻도 '대가', '거장'을 뜻하는 셰프와는 조금 다르게 뻗어나가 '족장', '우두머리', '수사반장' 등을 뜻한다. 



이 단어는 원래 머리나 최고를 뜻하는 라틴어 'capum'에서 온 단어로 'Captain', 'Cap', 'Chieftain' 등의 비슷한 파생어들이 생긴다.


족장이던 요리장이던 당대의 거장이던 어느 집단의 우두머리인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 원 뜻은 잘 살아있다.



다시 튤립으로 돌아와 얘기하자면 빅 치프의 꽃은 크다.


정확히 얘기하면 머리가 크다.


키도 크고 다 큰데 머리가 유독 커서 일반 규격의 튤립만 키워본 사람이 야외에서 빅 치프 꽃을 보면 너무 거대한 머리가 바람에 붕붕 휘둘리는 걸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나도 어릴 적에 거울을 보다가 같은 이유로 놀란 적이 있어 마른 몸을 더 키워 비율을 맞춰보려고 웨이트를 열심히 했더니 지금은 머리도 같이 커졌다.


내가 빅 치프다.




백합과 양파의 이름


비단 꽃뿐만이 아니라 식물들의 이름 그 자체도 재밌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가장 잘 아는 구근 식물 중 하나인 백합과 하루에도 꼭 한 번은 먹게 되는 야채 양파는 같은 의 알뿌리 식물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양파가 백합과에 속하는 식물로 겹겹이 둘러싸인 알뿌리의 형태 또한 비슷한데 백합이라는 이름의 뜻 자체가 백개의 비늘이 합쳐져 만들어진 알뿌리라는 뜻이다. 



반대로 양파의 이름 또한 똑같다.


양파의 영어 이름은 'Onion'으로 통합을 뜻하는 라틴어 'Unionem'에서 파생된 프랑스어 'Union'이 변형된 단어로, 발음대로 표기하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 '어니언'으로 흘러들어온다.



옛날부터 알뿌리의 형태가 뭔가 합쳐진 걸로 보이는 건 동양이나 서양이나 똑같았나 보다.




이름을 통해 우리는-


인간은 사물을 인식하면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


어떤 사건을 통해 바뀌기도 하지만 이름은 존재를 기록해 시간과 시간을 이어준다. 



모든 꽃의 이름 역시 그 안에 꽃의 특징을 담고 있으며 이야기를 전해준다.


수선화는 물에 비친 신의 모습을, 튤립은 오스만 제국의 터번을.



백합이라는 이름은 알뿌리의 모습을 담고 있지만 Lily라는 이름은 꽃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Louloudi'에서 그대로 전해졌는데, 어쩌면 우리가 꽃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꽃 중 하나로 백합을 떠올리는 건 이미 옛날 그리스 시절부터 그래 왔기 때문이 아닐까.


오래전부터 인간은 이상향을 그리며 정원을 만들어왔고 꽃은 그 안에서 현실과 이상, 신화와 역사를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현대의 정원 또한 사람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원더랜드가 된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의 정원을 이야기할 때 한 뼘이니 몇 평이니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고 자랑스러워도 하지만 우리가 전해지는 이름을 알고 그걸 불러줄 때 단순히 일상에서 벗어나는 정도를 떠나 새로운 시공간이 열린다.



만약 정원에 단 한 송이의 꽃만 있다해도 전통 있는 꽃들과 그 꽃들이 가진 의미, 이야기들은 결코 작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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