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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성 Dec 10. 2019

한겨울에 꽃 심기

- 겨울에 꽃을 심는다고?


구근이나 숙근 식물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겨울에 꽃을 심는다는 얘길 들으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일반적으로 꽃은 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시그널이고 겨울은 모든 생명이 멈춰버린 듯 정적인 시간 덩어리다.


하지만 내가 심는 식물들은 입김이 나올 정도로 기온이 떨어진 후에 심어야 비로소 잠에서 깨어나고, 세상이 얼어붙는 계절 동안 내가 집구석에 틀어박혀 속 편히 귤이나 까먹을 때 땅속에서 날이 풀리는 날만 기다리며 꽃봉오리를 가다듬는다. 



사람들은 겨울이면 더 따뜻한 옷과 난방기구를 찾지만, 야생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은 저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계절을 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수선화나 아이리스, 튤립처럼 영하권에서 월동을 하는 식물에게 겨울은 당연히 거쳐가는 계절이고 그저 한 바퀴의 생장 주기를 완성시키는 퍼즐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루 종일 영하권에 머물기도 하는 이 혹독한 날씨에 한없이 여려만 보이는 이 생명들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겨울을 나고 있을까?




- 겨울, 우리의 발 밑


우리는 우리 발 밑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끈끈한 탄화수소 구성물이 자갈들을 꽉 붙잡고 있는 아스팔트가 아닌, 식물이 심어질 수 있는, 부드러운 흙을 걷어내고 심어져 겨울을 나고 있는 식물들이 살고 있는 그곳.



우리의 발 밑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아늑한 장소다.


한반도 중부지방으로 올라가면 겨울에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날은 예사로 찾아오는데 경기권과 강원도까지 올라가면 겨울에 땅이 몇십 센티미터까지 얼어붙기도 한다.


과연 식물들이 이런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 굳이 궁금해하지 않아도 기억을 잘 떠올려보면 우리는 매년 봄이면 땅을 뚫고 올라오는 식물들을 만나고 있다.



심지어 나무들은 그 거대한 몸통을 땅 위로 드러내 놓고도 잘만 겨울을 난다.


대신 같은 식물이라도 리그닌 갑옷을 꺼내놓고 겨울을 나는 나무와는 달리 숙근과 구근 식물들을 땅 속에서 겨울을 나는 법을 택했다.



어차피 수분이 얼어 잎은 쓰지 못하기 때문에 양분을 아끼는 차원에서 뿌리 부분만 남길 수 있다면 차가운 바람과 눈을 직접 맞는 수고도 덜고, 바깥보다 비교적 따뜻한 땅 속에서 최소한의 활동을 유지하며 다른 식물들보다 조금 더 일찍 봄을 준비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우리가 환한 땅 위에서 추위에 덜덜 떨고 있을 때 캄캄한 땅 속에선 알뿌리들이 땅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냉기가 언제쯤 온기로 바뀌나 지루해하며 하품이나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어떤 땅 속을 좋아할까?


땅 속의 겨울은 바깥보다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기 때문에 식물이 계절을 보내기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트릭이 있는데 우리가 흔히 꽃밭이라고 생각하는 공간은 흙을 휑하니 드러내 놓고 겨울에는 얼었다가 봄에는 뜨거워지는 불안정한 공간이다.



이게 어떤 느낌인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알뿌리 식물들을 땅에 콕콕 박은 뒤 그 위에 돌판을 하나 올려둔 셈인데 사람이 거기서 산다고 생각하면 여름엔 뜨거운 햇빛으로 돌판 구이가 되고 겨울엔 돌이 머금은 냉기에 입이 돌아간다.


이 부분에서는 구근 식물도, 숙근 식물도 별로 다를 바 없다.



실제로 다년생 식물들이 좋아하는 땅은 부엽토가 깔려 천연 단열재 역할을 해주는 땅으로 이 부엽층 아래의 흙은 좀처럼 얼지 않거나 얼어도 표면이 얕게 어는 정도에서 끝난다.


부엽층이 깔려있다는 얘기는 그 위에 가을마다 낙엽들을 두툼하게 쌓아줄 활엽수가 있다는 얘기고 여름에 이 활엽수들은 부엽층을 만들어주는 것도 모자라 잎을 펼쳐 뜨거운 직사광선을 초록빛으로 바꿔준다.



숲이 아닌 벌판에서 자라는 다년생 꽃들도 많은데 여름에 수많은 잡초들이 왕성하게 자라 햇빛을 가려준 후 겨울에는 이불이 되어 차가운 지면을 덮어준다.



흔히 식물의 생태를 생각할 때 토양과 식물, 날씨처럼 중요한 개념만 생각하기 십상인데 실제로는 눈에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많은 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순서대로 짜인다.




- 겨울 동안 구근은,


숙근 식물이 겨울잠을 자기 위해 단순히 뿌리와 최소한의 생장점만 남긴다면 구근 식물은 통통한 알뿌리 상태로 겨울을 나며 봄이 오자마자 미리 만들어 둔 잎과 꽃을 쏘아 올릴 준비를 한다. 



구근을 만져본 사람이라면 껍질을 벗겨냈을 때의 매끈하고 조금은 차가운 감촉을 기억하고 사람의 촉각은 손 끝으로 그 차가운 감촉이 사실 수분이며 이 물체가 얼 수 있다는 사실을 무의식 중에 감지한다.



아닌 게 아니라 알뿌리의 구성 성분은 약 75%가 수분으로 만약 얼기라도 한다면 팽창하는 수분에 의해 세포벽이 무너지며 수분이 얼어버린 탓에 양분을 받지 못한 세포가 괴사 한다.


날씨가 풀린 후 이 부분이 균에 의해 검게 변색되면 썩었다는 걸 그제야 우리가 보고 알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한겨울에 물로 가득 찬 구근을 심는다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마늘 같은 알뿌리 안에 발열기능이라도 있어서 얼음도 녹이는 걸까?


걱정과는 달리 구근 식물들은 단열이라는 특별할 것 없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추위 속에서 살아남는다.



- 단열의 원리


흔히 단열이 깨진 집을 겨울에 가보면 창문가 주변에 곰팡이가 폈다거나 자꾸 어딘가에 물방울이 맺혀 습하고 축축한 공기가 집안을 유유히 떠돌아다닌다.



겨울을 뜻하는 Winter의 어원이 축축하다는 Wet이나 물을 뜻하는 Water에서 왔으니 어쩌면 진정한 겨울을 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단열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 브리튼 섬의 원주민들이 보내던 겨울이 매년 그렇게 축축 했겠지. 



단열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의 원리는 공기층과 내부, 외부의 완전한 격리다. (두께가 아니다)


단열이 깨진 집은 집 내부가 외부 온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 공간을 중간에 임의적으로 만들어 단계적으로 온도가 변화하도록 만들어 줌으로써 내, 외부의 급격한 온도차를 줄인다. 



현관문으로 나가기 전에 중문을 설치하는 건 현관문이 열리며 들어올 외부의 공기를 내부의 공기로 따뜻해진 신발장 안에서 한번 완충하기 위함인데,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집안에서 기도가 얼어붙는 것 같은 차가운 공기를 마실 일이 없어진다.



현관문이나 신발장으로 가는 중문에 구멍이라도 뚫려있지 않은 이상 단열은 유지되고, 이 공기층은 추가적인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도 반영구적, 구조적으로 환경을 바꾼다.



복잡한 듯 단순해 보이는 이 작업을 구근은 보란 듯이 해낸다.




- 단열 왕


구근이 가진 단열재는 낙엽, 흙, 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이다.


이 단열재들이 동화 속 요정의 소박한 재료들로 보일 수 있지만 건축의 개념에서 보면 하나하나가 다 단열재로써 최고의 효율을 지니고 실제로 오랜 시간 동안 사용되어 온 재료들이다.



식물의 몸체는 셀룰로오스 성분의 녹말로 구성되어 있는데 죽은 후 수분이 빠져나가고 말라버린 녹말, 즉 이 탄수화물 덩어리는 속에 빈 공간이 많은, 자연적으로 공기층을 형성하고 있는 단열재가 된다. 


오랫동안 눌리며 겹겹이 쌓인 낙엽층은 1차 단열층이 되고 다음은 토양과 물이다. 



단열 효과를 내기엔 빈 공간이 너무 큰 토양은 혼자서는 단열재가 될 수 없지만 흘러내리는 물을 붙잡아둠으로써 함께 단열재의 역할을 수행한다.


얼어붙은 지표면의 시작은 단순히 추워서 생겼지만 그 자체로 땅 속으로 들어갈 냉기를 잡아주는 훌륭한 단열재가 된다.



 얼음이라는 이 불안정한 물질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냉기를 흡수하고 열을 내뱉는데 얼음 층의 두께도 공기층을 차단하지만 냉기가 땅속으로 파고들 틈도 없이 얼음 속으로 흡수된다.


이렇게 얼어붙는 위험이 줄어든 땅 속에서 구근은 자신의 몸 일부를 경화시킨 껍질이라는 이불을 덮고 겨울을 보낸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안전해 보이지만 구근은 여기서 마지막 장치를 하나 더 건다.




- 한발 더 남았다.



인간이 매년 예측에 실패한다는 예기치 못한 한파가 올 걸 대비해서인지 구근은 마지막까지 준비한다.


마지막 장치는 바로 스스로의 몸에서 수분을 빼내 어는점을 낮추는 것이다.


바닷물도 결국에는 어는데 이 방식으로 어는점이 낮아져 봐야 얼마나 낮아지겠나 하겠지만 사실 많이 낮아질 필요가 없다. 


단열의 원리를 잘 이해했다면 눈치챘겠지만 주변보다 조금만 더, 혹시나 한파가 땅 속까지 파고들더라도 주변의 토양이 먼저 얼 정도까지만 낮아지면 된다.


그렇게만 하면 토양이 얼면서 얼음벽이 생기고 껍질과 토양 사이, 껍질과 구근 사이에도 공기층 있기 때문에 자연히 단열층이 생긴다.



구근 식물이 혼자 자체적으로 버틸 수 있는 온도는 영하 권에서도 약 5도 정도, 그나마도 한시적으로나 버틸 수 있지만 이런 단열층의 구조를 이용해 영하 30도 정도의 냉대 기후에서도 문제없이 겨울을 난다. 



구근 식물이 손발만 있었어도 봄마다 같이 손잡고 겨울 동안 곰팡이가 생긴 집들 찾아다니며 단열 보강 작업으로 떼돈을 벌었을 텐데 참 아쉽다.




- 한겨울에 꽃을 심어도 되나요?


예전에 아버지께서 어렸을 적 동네에는 아침마다 거지가 돌아다녔다고 한다. (걸배이라고 부르셨다.)


쪽박을 디밀며 "밥 좀 주소."라고 말하면 할머니께서 남은 밥과 잔반을 긁어 쪽박에 담아주셨다는데 내가 알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정말 주셨냐고 되물었었다.


사실 그 시절 아버지의 어릴 적 형편이 남에게 밥을 줄 만큼 좋았을 리도 없었고 내가 아는 할머니의 모습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격언의 화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주셨었다고 한다.


이유인 즉 그 거지가 꼭 자식들을 주렁주렁 데리고 다니면서 구걸했는데 의 뒤에서 할머니를 말똥말똥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빛 때문인지 거의 항상 줄 수밖에 없었고 하다못해 못주는 날이 있더라도 대뜸 쫓아내진 않았다고 한다.


동냥은 못 줄 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고 했던가-



겨울에 구근 식물을 심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구근 식물은 자신이 만든 원리원칙 속에서 겨울나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사람이 그 소박한 이불을 뺏어가지만 않는다면 얼마나 추운 겨울을 맞이하던 이듬해 봄에 보란 듯이 꽃을 피운다.




- 한겨울에 꽃 심기


한겨울에 꽃을 심는 방법은 간단하다.


겨울을 나는 구근 식물이 가진 단열재들인 낙엽층과 흙, 껍질 속에 알뿌리를 숨겨주면 된다.



구근을 심는 과정이야 이렇게 길었지만 숙근 식물은 스스로 물을 쭉 빼낸 상태이기 때문에 땅에 묻어두기만 하면, 심지어 봄이 오기까지는 얼음 속에 얼려두어도 봄에 싹을 틔운다.



이렇게 꽃들을 심었다면 끝이다.


그다음은 집에 들어가 귤이나 까먹으며 봄을 기다리면 된다.



말이 좋아 따뜻한 봄날이지, 봄과 여름은 식물에게 투쟁의 계절이고 꽃을 키우고 있는 사람에게도 가장 바쁜 계절인데 겨울 동안 편히 쉴 수 있는 땅 속으로 식물들을 보내줬다면 이제 사람도 편히 쉬자.


겨울은 그게 가능한 유일한 계절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부터 좀 쉬고 싶다. 


매년 겨울마다 심을 건 어찌 이리 많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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