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민성 Dec 06. 2019

구근을 캐지 않아야 하는 이유

구근은 캐야 할까? 캐지 않아도 될까?


흔히 구근 식물들은 꽃이 지고 나면 캐서 보관해야 한다는 상식이 널리 퍼져있다. 



이렇게 캐낸 구근 식물을 보관하는 방법과 소독하는데 좋은 소독제들, 그 소독제를 물에 섞는 비율과 담그는 시간까지 자세하게 적어놓는 경우가 많은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정말 해야 하는 일일까?



처음부터 구근은 여름이 오면 캐야 하는 식물일까, 아니면 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식물일까?


구근을 캐지 '않아도 되는' 건지, 구근을 캐지 '않아야 하는' 건지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 해 동안 농장에 심어뒀던 구근을 캐는 횟수는 생각보다 많지만 개인적인 이유는 없다.




구근을 캐는 이유


샘플을 확인해야 한다거나, 선물을 보내거나, 환경이 맞지 않아 조금 더 좋은 자리로 옮기는 등, 결과적으로 이동이 필요한 때에만 캐고 수확하는 행위의 대부분은 농장의 수익과 관련된 일들이다. 



개인적인 화분의 경우 휴면기 동안 싹이 자라지도 않는 화분을 집안에 두기엔 공간이 그리 넓지 않기 때문에 흙도 한번 갈아줄 겸, 영양 보충도 해줄 겸 캐서 다시 농장에 심는다.



단순히 보면 알뿌리 있는 곳을 15 세제곱 센티미터 정도 가량 파고 들어가 쓰윽 꺼내는 행위지만 이마저도 사실 굉장히 귀찮고 사전 준비작업들과 뒤처리를 생각하면 시간이 생각보다 걸리는 작업이다.



그 외에는 딱히 캘 이유를 못 찾거니와 농장에 심어둔 구근들을 모두 캐내려면 몇 주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숲이 파헤쳐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어차피 캐낼 이유도 없지만 그렇게 캐낸 구근들을 다시 심는 상상까지 해보면 캔다는 마음도 전혀 들지 않는다.




구근을 캐지 않는 이유


반대로 왜 캐지 않을까?


단순히 캘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두는 걸까?



사실이긴 하지만 조금 더 성의 있는 이유로 대답해보면 그대로 두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구근은 정확히 얘기하면 식물의 줄기 부분이지만 영양 주머니 역할을 하는 부분으로서 구근 식물이 위험 상황을 대비해 차곡차곡 모은 양분을 땅 속에 안전히 보관하는 기관이며 땅 속에 있는 상태가 당연하다. 



대부분 땅 밖으로 꺼내지더라도 껍질이 있어 버티지만 백합이나 패모처럼 껍질이 없는 구근 식물의 경우 밖으로 노출되면 알뿌리 표면이 빠르게 말라 들어가는데, 길던 짧던 구근 식물의 알뿌리는 흙 밖에 나와있어도 되는 기관이 아니다.



그리고 구근 식물은 다년생 식물로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오랫동안 살며 알뿌리를 늘리는 식물인데 매년 수확 해준다는 것은 1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니는 청소년과 비슷하다.



구근 식물도 집이 필요하고 친구들이 필요하며 가족도 만들어야 성장한다.


그러려면 정착해야 한다.


구근 식물의 정착지는 당연히 땅이다.




왜 캐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을까?


흔히 구근을 캐야 하는 이유로 꼽히는 건 한여름의 무더위와 장마인데 이 두 가지는 구근 식물들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이긴 하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구근 식물은 정착해야 하는 식물이기 때문에 구근 식물을 정 키워야겠다고 한다면 해결해야 하는 건 무더위와 장마지 절대 구근이 짐 싸들고 계절마다 옮겨 다녀야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사실 장마는 연 강수량이 조금 집중되는 감은 있지만 어지간히 물을 흡수하고 배출할 수 있는 땅이라면 장마가 건강한 구근에게 별다른 해는 입히지 못한다.


다만 봄 동안 기력을 쏟아붓고 여름이 올 때까지 미처 자구를 만들지 못하고 더위에 소멸해버린 구근 식물들의 시체가 장마 기간에 유독 도드라지게 부패하기 때문에 마치 비를 맞으면 구근이 썩는 것처럼 보인다.



건강한 구근들은 휴면기 동안에도 수염뿌리를 흙 속에 내린 채로 적당량의 습기를 머금었다 뱉고를 반복하며 다시 싹을 틔울 계절을 기다린다.



이렇게만 써놓고 보면 구근을 수확한다는 행위가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정말 좋은 점이 하나도 없을까?


별 문제가 없는 환경에서야 구근에게는 좋은 점은 확실히 없는 것 같고 사람에게 좋은 점은 딱 한 가지 있다.



수염뿌리가 뜯겨나가며 땅 밖으로 끌어올려진 구근은 죽을 것 같은 마음에 꽃눈을 더 잘 만드는 경향은 있다.


문제는 그렇게 정말 죽어버리는 구근 식물도 많다는 점이다.


식물도 나름의 신경 기관이 있고 스트레스라는 장치가 있다.




구근 소독이 해주는 역할


소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균에 의한 감염 방지와 곰팡이 균의 소독 및 방지로 외관상으로는 비교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



하지만 소독을 해야 할 만큼 오랫동안 밖에 나와있는 것보다는 다시 흙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 맞고 그 시기는 짧을수록 좋다. 



매년 네덜란드에서 선박을 통해 이동하는 튤립 구근들의 경우 이동 기간이 월 단위로 넘어가기 때문에, 그리고 검역 단계에서 불필요한 시비를 피하기 위해 소독이라는 절차를 거치는 게 당연하지만 일반 가정에서는 구근 식물이 딱히 캐어질 일도, 소독이 필요할 만큼의 절차도, 오랫동안 보관될 일도 없다.



이를 엉뚱하게 오해하여 마치 반드시 수확하여 소독을 한 후 오랫동안 보관해야 하는 것처럼 알려져 있기도 하다.


알뿌리들을 수확한 상태로 오랫동안 보관할 때 알뿌리들이 죽는 이유는 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필요한 건 소독이 아니라 그 전에 땅으로 돌려보내는 작업이다.




수확하기 전에-


설령 이 모든 내용을 이해할지라도, 오히려 알면 알수록 구근 식물이라는 건 한번 캐보고 싶어 진다.


잘 자라고 있는지, 번식에는 성공했는지, 혹시나 몇 달 안 본 사이에 썩어버리진 않았는지 등등-



이유라는 건 만들어내면 되기 때문에 어떤 이유를 새로 만들어내서라도 캐려고 하면 언제든 캘 수 있다.


다만 만약 다음과 같은 이유라면 한번 정도는 재고가 필요하고 가능하면 캐지 않는 편이 좋다. 



- 번식을 위해.


구근에는 모구와 자구라는 개념이 있다.


이름 그대로 자구는 시간에 걸쳐 모구로 성장하며 그때까지는 모구의 도움이 필요하다.


 모구와 자구는 생장판에 서로 연결된 채로 영양을 공유하며 일정 기간이 지나 자구가 충분히 성장하면 자연스럽게 모구가 소멸되며 자구들끼리 서로 생장판을 나눠가진 채 각각의 개체로 나누어진다.



흔히 숙근이나 목본 식물의 포기를 나누는 식으로 붙어있는 구근들을 억지로 떼어내게 되면 모구는 얼마 남지 않은 양분으로 불완전한 자구를 다시 만들어야 하며 자구는 모구의 도움 없이 불완전한 개체로 성장하거나 천천히 소멸한다. 



3, 4년에 한 번 정도 구근을 캐서 흩뜨려주는 게 좋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이미 독립한 구근들이 새로 살 집을 찾아줘도 좋다는 의미이지 아직 모구에 붙어있는 자구들을 억지로 뗀다는 의미가 아니다.



- 장마 때 너무 습할 것 같아서.


만약 장마 때 너무 습해서 땅에서 악취가 올라오고 산소가 차단되어 산화철 환원 작용으로 흙이 파랗게 변할 정도의 변화가 일어나는 땅이라면 당연히 캐야 한다.


그리고 그다음은 소독과 보관이 아니라 다시는 같은 이유로 자리를 옮길 일이 없도록 배수와 통풍이 좋은 흙을 찾아 다시 심어줘야 한다. 



- 소독을 해주면 좋을 것 같아서


네덜란드에서 도착한 튤립 구근들을 확인할 때면 간혹 아주 기분이 상하는 경우가 방부처리나 소독을 잘해놓은 덕에 이미 죽은 구근들도 겉으로 티가 잘 안 나 나중에 발견하게 되는 경우다.


생명은 죽었을 때 부패,  분해라는 과정을 거치며 이를 외관상으로도 보여준다.


일반적인 소독은 결과적으로 이미 죽어있는, 혹은 죽어가는 구근을 숨겨주는 용도 밖에 되지 못할 뿐 어떤 근본적인 해결책이나 방법이 되지 못한다. 



- 양분이 더 많은 곳을 찾아주기 위해.


화분의 경우에는 맞다.


맞다기보다는 안타깝게도 거의 유일한 카드다.


하지만 야외 노지에 심었는데도 같은 이유를 찾는다면 그건 당초 그 땅에 원예용 화초가 들어갈 순서가 아직 아니며 화분에 키우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는 뜻이다. 



화분과는 달리 야외는 생태계가 자연히 구축되는데, 토양과 암석을 기반으로 잡초가 자라고 이후 수목이 형성되면 크고 작은 동물들과 맞물려 유기적으로 양분이 생산되고 다시 흡수되는 공간이 형성된다.


원예용 화초는 그 안에서 잡초만큼의 생명력을 지니지도, 나무들 만큼의 생산력과 흡수력을 지니지도 못해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이런 생태계에 기생하는 형태로 살아가야 한다.



만약 장기적으로 정착시키고자 심는다면 이렇게 '기생하기' 좋은 땅으로 옮겨주는 것이 맞으며 더 좋은 환경을 찾을 때까지 시행착오는 거칠 수 있지만 종래에는 완전히 정착해야 한다.




수확했다면-


수확한 채로 보관하는 구근은 어떻게 해서든지 손실이 일어난다.


캐는 순간부터 죽기도 하고 하루 만에 죽기도 하며 흙에 심지 못하면 결국 죽는다.



만약 어떤 이유에서든지 수확을 했다면, 그리고 불가피하게 장기간 보관해야 한다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상태로 겨울을 나야 한다면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손실을 최대한 줄인다.



- 땅 속에 묻는다.


완전히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가식(가짜로 심는다는 뜻)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누차 설명했지만 구근에게 가장 좋은 환경은 땅 속이다.


사람들은 보통 구근 보관장소로 햇빛이 들지 않고 너무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으며 통풍이 잘 되고 온도 변화가 적은 장소를 찾으라는 얘길 듣지만 그건 애초에 땅속 환경에 대한 설명이다.



다만 임시로 묻어두는 거라면 실뿌리가 흙에 박히는 걸 방지하기 위해 자루에 담아 묻는 편이 좋으며 가능하면 양지보다는 음지에 심어야 봄이 와도 싹이 올라오기 전에 꺼내서 옮길 수 있다.



- 땅 속과 비슷한 장소를 찾는다.


땅 속과 비슷한 환경이라고 하면 흔히 화분 속을 생각할 수 있지만 화분 속은 땅 속과 전혀 다른 환경이다.


만약 화분 채 그대로 밖에 내놓는 다면 겨울철 배수가 여의치 않으며 온도 변화에 취약하고 공기조차 잘 통하지 않는 데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물이 얼면서 구근을 짓누르거나 구근 내의 수분이 팽창하며 냉해를 입게 된다.


화분에 심어 실내에서 키울 것이 아니라면 아예 심지 않는 편이 더 나으며 땅 속만큼이나 어둡고 차가운 장소가 좋다.



- 종이로 감싼다.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물질 중에 가장 완전한 물질 중 하나가 목재인데 종이 또한 목재의 일종이다.


신문지 등의 부드러운 종이로 푹신하게 감싼 구근은 마치 나무 상자 안에 보관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으며 단열, 배습, 보습, 통풍 등 여러 가지 문제가 해결된다.



흔히 여름 동안 양파망에만 넣어 보관하는 경우가 많은데 양파망은 통풍 외에는 물리적 충격이나 온습도 변화에 취약하다.


땅 속에 심지 못한다면 외부 어디에 보관하던 종이를 활용하는 편이 좋다.



가장 좋은 방법


 쭉 한 바퀴 돌고 왔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좋은 환경을 찾아 심고, 가능한 캘 일을 줄이며, 번식한 구근들을 수확하고 싶다면 봄에 싹이 올라오는 형태를 봐서 독립이 가능할 것 같은 개체들만 찾아놨다가 가을이 오기 전에 선택적으로 수확하는 방식이다.


수확이라는 행위 자체가 구근 식물의 바이오 리듬을 깨뜨리는 일이며, 이를 최대한 지켜줄 때 가장 손실을 줄일 수 있다.



다년생 식물이 한해살이 식물보다 비싼 이유는 사람이 매년 손대지 않아도 혼자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며 누릴 수 있다면 이점을 최대한 누리는 게 좋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