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민성 Mar 29. 2020

소염제

2020년 3월 24일 딸의 소식

예방접종을 맞고 온 후로 열이 38도까지 올라가서 해열제를 먹었다는 얘길 들었단다.


벌써 타이레놀을 먹는 나이가 됐나 싶어 신기하기도 하고 결국 너도 소염제를 달고 사는 건가 괜히 미안해지더라.


우리 집 사람들은 원래 몸에 열이 많아 염증이 쉽게 생겨서 컨디션 안 좋을 땐 소염제를 무슨 영양제 마냥 꼬박꼬박 챙겨 먹는데, 그렇다고 딱히 다른 잔병은 없어서 소염제만 있으면 거의 만병통치약인 게 한편으론 장점 아닌 장점이란다.




너의 친할아버지, 그러니까 내 아버지 얘길 굳이 하자면 외국에서 사 온 물건을 항상 마음 깊이 좋아하셨던 분인데 어느 날은 어디서 났는지 미국 마트에서 파는 생수통만 한 아스피린 통을 가지고 오시더라.


그걸 하루에 한 알씩 먹으면 혈액순환이 좋아진대나 뭐래나.


우리 집 남자들이야 몸에 염증만 없어도 신체 능력이 배는 올라가니 그걸 먹는 동안 컨디션이 좋으셨나 보더라.


그때부터 그게 없어질 때쯤 되면 남포동 깡통시장에서 사 오시는 건지 아는 사람한테 부탁하는 건지, 지금처럼 해외직구도 없을 땐데 항상 그 자리에 아스피린 통이 놓여있더라.


난 무슨 오메가 쓰리 드시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따로 드시고 계시더라.


얼마나 더 건강하시려고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건강 하나는 정말 무슨 일생의 숙명처럼 지키시는 분이셨단다.


본능이었는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드시던 약들이 대개 염증을 가라앉히고 혈액순환을 훨씬 더 좋게 해 주던 약들인데 일상생활에서는 참 좋았을 조합이었지.


근데 사람 일은 참 모르는 거라 그게 할아버지 마지막 날에는 출혈이 안 멈추던 이유가 되더라.


덕분에 아빠는 그때 좋은 거 하나 배워서 여태껏 중학생 혈압 유지하면서 살고 있지.


소염제 얘기하다 혈압 얘기로 빠졌는데 그냥 뭐든 적당한 게 좋다는 얘기였어.




너도 비염이 있더라고.


그거 원래 아빠 꺼였거든.


사춘기 올 때까지 맨날 코 물고 다니다가 따뜻한 나라에 2년 정도 살다가 오니까 싹 나은 거야.


그때 진짜 좋았는데 한국에 돌아오니까 내 친구 중에 한 명이 어느 날 매운 눈물 라면 먹으러 가자더라고.

당시엔 그게 유행이었나 봐.


그거 한 그릇 먹자마자 콧물 터져서 그 뒤로 한동안 다시 비염 달고 살다가 요즘은 봄에만 좀 그렇다.


그 친구가 누군지는 네가 이걸 읽을 때도 아직 친구면 그땐 이름 말해줄게.


아직도 그날 생각하면 또 콧물 터지는 것 같아서 열 받는데 벌써 20년은 친구로 지냈으니 앞으로도 20년은 더 친구이지 않을까 싶네.




염증이 한번 생기면 잘 안 낫고 사람을 괴롭히더라.


제일 좋은 게 염증이 생길 것 같을 때 미리 소염제 챙겨 먹는 거더라고.


몸살도 염증, 입 안 자주 허는 것도 염증, 콧물 나는 것도 염증, 어쩌다 갑자기 기침 나는 것도 알고 보면  염증, 뾰루지도 알고 보면 염증.


앞으로 감기처럼 열나고 한기 들면 그거 아마 감기가 아니고 염증일 거야.


내가 그랬으니까.




너무 매운 거 먹지 말고, 아프다 싶으면 바로 약 먹고.


태어나자마자 쓸데없이 물려준 게 하필 이런 건가 싶어서 괜히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마무리.



작가의 이전글 살 빼는 방법과 꽃 키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