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날리는 여름

여름

by 조민성

셀티의 털이 빠지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나설 때마다 셔틀랜드 쉽독의 털이 흐름을 타고 신발장 안으로 들어온다.

더 이상 따뜻한 털이 필요치 않다고 결론을 내렸나 보다.

이중모를 가진 개들 중 털이 긴 종일수록 빠지는 모양새가 안쓰럽고 또 불편하다.

다행히 농장에 몇 시간 풀어놨다가 집에 갈 때쯤이면 흉하게 삐져나와있던 털 뭉치들이 훨씬 줄어 보인다.

어디 갔을까 궁금했던 털 뭉치들은 숲 속을 걷다 보면 무릎 높이의 낮은 나뭇가지들마다 걸려있다.

봄이면 아무 일도 못하게 만들던 가려움이 어느덧 멈췄다.

백로

강원도의 차가운 봄과 숲 속의 작은 단서들은 남부지방 태생인 나를 속일 때가 많다.

블루하와이

내가 아침마다 뱉는 작고 뽀얀 입김이 계절을 가린다.

작약

농장에는 봄과 여름이 뒤섞여있다.

정해진대로만 돌아갈 것 같은 식물들 중에도 바보가 있어서 아직도 봄인 줄 알고 꽃을 피우는 봄꽃들이 있다.

글로브마스터

그저께 농장 어딘가에서 이제야 피고 있던 수선화를 봤는데 며칠 차가웠던 빗방울에 마지막 힘을 모아 꽃을 올린 듯했다.

안타깝지만 여름 안에 수선화가 자랄 공간은 없어서 정말로 어디에 짓눌린 마냥 처량한 꽃을 보여주고 있었다.

블루하와이 꽃

계절을 맞춘 식물에겐 비도, 햇빛도, 온도도 그 계절의 모든 것이 축복이다.

계절을 착각하고 억지로 꽃을 피워낸 그 수선화는 이제 씨앗을 맺기도 전에 꽃을 잃고 잘못한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 계절의 온도, 습도, 곤충들-


어느 하나도 한해의 양분을 모아 피워 올린 수선화를 맞이해주지 않는다.

화이트헤븐

멀지 않은 곳에 큰 키로 자라고 있던 백합들이 내려다보며 무심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붓꽃

이 곳의 터줏대감 격인 붓꽃들은 자로 잰 듯 시기를 맞춰 꽃을 피워내고 있다.

대체로 어둡고 습한 숲 속에서 차가운 아침의 햇빛보다는 오후 늦게까지 이어지는 따가운 햇빛을 더 좋아하는 듯하다.

작년에 심었던 붓꽃들의 꽃이 피지 않는 걸 보며 아직 계절이 아닌가 했는데 지금 보니 내가 잘못 심었었나 보다.

하얀 붓꽃

내 손을 빌리지 않고도 잘 자라는 꽃들을 보며 한편으로는 경외와 학습을, 그 뒤편에 질투와 안도감을 가진다.

노랑꽃창포

흔히 꽃을 키운다는 표현을 많이 하지만 이 곳에서 꽃을 키우는 건 내가 아니다.

내 시각에서 연못 속 올챙이는 자라서 개구리가 아니라 노랑꽃창포가 된다.

또 개들의 털이 되어 우리 집 마당에 흩날린다.

어제 청소기로 개들의 털 뭉치들을 모아 다시 숲 속에 반품했다.


숲이 주는 선물은 초봄에 받을 때가 제일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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