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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입니다.
by
조민성
Oct 18. 2019
겨울은 정말 금방 찾아왔다.
일 년 중 가장 바쁜 늦가을
,
새로 들어온 모종들을 분류하고 포장하면서 한 번도 찬 공기를 신경 쓸 틈이 없었는데 모종을 채 심기도 전에 땅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심어야 하는 모종은 약 3만 구의 구근과 2 천묘 정도의 숙근 모종들.
이곳 횡성의 날씨로는 3월 말부터 꽃이 피기 시작할 테니 최소한 3월 초까지는 심어져야 양분 손실 없이 꽃을 피울 수 있을 터였다.
땅이 완전히 얼어붙는 한 달을 빼고 남은 시간은 3달 남짓.
한 달에 심어야 하는 모종이 1만 개 정도라고 하면 격일로 심었을 때 하루에 660개 정도는 심어야 했다.
평당 심어지는 모종은 100개를 조금 넘어가니 하루에 6평 정도.
어지간한 집 화장실 2개를 조금 넘는 넓이.
단순히 심는 게 아니라 새로 개간해야 하는 곳의 잡목들을 정리하고 길도 내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작업이 오래 걸린다.
어떻게 한해도 평화롭게 지나간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거 다 습관이야."
1시간 뒤 훈련소로 입대하는 나와 마지막 점심식사-하필 부대찌개-를 함께하던 삼촌이 툭 뱉었다.
"뭐가요?"
"네가 하고 있는 행동들, 앞으로 네가 할 행동들이 전부 다 습관이라고."
내가 마지막으로 정확히 기억하는 삼촌은 군복을 입고 휴가 나와 내 장난감을 사주던 특전사였다.
"하던 놈은 그냥 계속 해. 안 하던 놈은 계속 안 해. 습관이 그래. 잘하는 놈은 매일 잘하는 게 습관이고 못하는 습관이 든 놈은 계속 못해."
배 나온 아저씨의 입에서 굉장히 특전사스러운 말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
"너도 습관을 잘 들여야 돼. 뭐든 잘하는 습관을 들이면 그냥 그대로 쭉 가는 거야."
그 말이 2년 남짓한 내 군생활 내내 귓가에 따라다니다 못해 한겨울 숲에 우두커니 서있던 그때에도 귓가에 맴돌았다.
- 습관이다 이거지....
전투부대에 배치돼 받았던 30번 이상의 크고 작은 훈련에서 우선 시작하고 한번 시작하면 잘할 때까지 하는 습관만 들였었다.
우습게도 성취감보다는 못하는 습관이 들까 봐, 시작도 안 하는 습관이 들까 봐 무서워서 그랬었다.
"우선 시작부터 해보자."
이 말조차도 습관적으로 내뱉으며 잡목들을 뽑기 시작했다.
처음보다는 두 번째 뽑을 때가 더 빠르고 세 번, 네 번 횟수가 늘어갈수록 점점 요령이 붙는다.
여러해살이 식물들은 심는 시기가 정해져 있어서 그때 심지 않으면 1년이 날아간다는 사실이 맘에 걸려 몇 번이나 달빛이 밝아 보일 때까지 숲 속에서 꽃을 심곤 했다.
그렇게 겨울은 계속 얼어붙어갔다.
겨울 한가운데.
가뜩이나 날이 짧아졌는데 그나마도 해가 떠있는 동안만 땅이 잠시 녹았다 얼기를 반복했고 화덕에 숯을 몇 개씩 붙여 놓고 작업할 곳을 미리 녹여가며 심어나갔다.
모종을 한 박스씩 비울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가도 남은 박스들이 더 많다는 걸 곧 알게 됐다.
춥기도 추웠지만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고 기억하는 시기였다.
얼음이 채 녹지 않은 이른 봄.
눈을 녹이며 설강화(Snowdrops)가 피기 시작했다.
초봄에 꽃을 피우는 구근들은 아슬아슬했지만 결국 다 심었고 남은 초여름 꽃들은 한 곳에 모아 컨테이너 채로 묻어 임시로 식재했다.
- 당분간은 좀 쉴 수 있겠지.
꿈속에서도 낙엽과 눈이 보이는 게 지겨워 수선화가 피기 시작하면 여름 꽃모종들을 꺼내 심기로 했다.
해가 뜨고 설강화가 서서히 열리는 모습을 보고서야 겨울이 무사히 지나갔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전체
경작
면적이 4천 평 정도 나오네요."
경영체 실태조사로 나온 김에 꽃구경 실컷 하고 위성사진을 찍어보던 산림청 직원은 놀랐다는 듯이 패드를 보여줬다.
다행히 최소 경작 단위는 훌쩍 넘겼으니 허가받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안 생기셨는데 되게 부지런하신가 보네요."
과연 이건 칭찬인가
아닌가-
난 대체 어떻게 생긴 걸까 진지하게 고민해보던 중에 직원이 다시 말을 꺼냈다.
"이거 다 직접 심으신 거죠?"
"그렇죠."
"어떻게 다 심으신 거예요?"
말해줬으면 믿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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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에서 야생화를 가꾸고 있습니다. 5.6헥타르의 숲 속에서 생기는 사람과 식물, 동물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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