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by 조민성

- 핸드폰을 노려본다


내일은 수업도 없고 아직 자재가 안 들어와 농장에 가도 작업을 못하는 날이다.


드릴 세트를 사야 작업이 가능한데 이번 달 공과금까지 계산하고 나면 20만 원 정도 모자라다.


"그냥 먼저 전화해보지 그래."


"안돼. 괜히 들쑤시는 것 같잖아."


"꽃은?"


"번식시키고 있어서 안돼."


아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나간다.


먼저 연락해볼까 하던 그때 드디어 폰이 울린다.




"민성 씨, 내일부터 혹시 시간 돼?"


- 완전 괜찮죠.


"네 뭐 특별한 일 없으면 괜찮을 거예요."


- 없어요 없어.


"그럼 한 이틀 정도만 데크 교체하는 거 도와줄 수 있을까?"


- 삼일도 돼요.


"네 괜찮습니다. 공구는 뭐 챙겨갈까요?"


- 임팩이랑 그라인더, 사포날.


"임팩이랑 그라인더랑 사포날 좀 챙겨 오면 될 거 같아."


- 그렇지.


"예 알겠습니다."


"내일 보자고."




"여보 드릴 샀어?"


나의 결제내역은 항상 감시당하고 있다.

가장으로서의 위엄이 굉장히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남자가 큰일 좀 하겠다고 산 건데 무슨 상관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근엄하게 대답했다.


"옙. 돈은 이틀 후에 들어옵니다."


"아까까진 돈 없다며?"


"김 사장은 일 끝나면 바로 넣어줍니다. 안 그래도 남는 돈으로 오랜만에 외식을 하려고 했습니다."


좋다. 태세 전환이 아주 박력 있다.

역시 돈을 남기니 가장으로서의 권위가 흐른다.


"그래. 요즘 중국음식 먹고 싶던데 교습소 옆에 있는 식당에 가자."


지금 감히 내 의사도 묻지 않은 채 중국음식점으로 가겠다는 건가.


기강을 바로 세울 필요가 있다.



"어쩐지 요즘따라 중국음식이 먹고 싶더라니."


집중해야 한다. 아직 결제 취소 버튼이 살아있다.




"이번에도 너무 잘해줘서 고마워!"


김 사장님은 늘 시원시원하시다.

아직 솜씨가 매끈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었는데 항상 좋은 면들을 먼저 봐주신다.



"입금은 좀 전에 해놨어!"


알고 있다.

역시 최고다.


이제 드릴 값은 확실히 나왔다.

아내에게 튀김요리도 사줄 수 있다.


톱밥을 마저 털어내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푼푼한 마음으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식당에 전화해봤어?"


"응. 바로 가면 될 거 같아."


- 하나가 더 있을 텐데.


"아 맞다. 아까 택배 도착했더라."


- 바로 그거지.


"아 정말? 빨리 오네. 알겠어. 이따 봐."





"뭐 시킬까?"


"아무거나 시켜 아무거나."


식당에 앉아서도 집에 먼저 와있을 드릴 생각에 머릿속이 온톤 나선형으로 돌고 있다.


"탕수육도 시킬까?"


"그거 빨리 나와? 작은 거 작은 거."


그저 빨리 먹고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음식이 문제가 아니다.


집에 가면 드릴이라는 이름의 위대한 도약이 기다리고 있는데,

내 작업의 판도를 바꿀 기적이 와있는데 지금 탕수육이나 칠리새우를 논하고 있다니.


비통한 심정으로 먹는 탕수육은 그 와중에도 맛있었다.




포장을 풀고 드릴 박스를 꺼냈다.


뚜껑을 열기 전에 잠시 코를 대고 향을 맡아보니 새 차 냄새가 났다.

냄새도 참 곱다. 어지럽다.


무릎을 꿇은 채로 조심스럽게 뚜껑을 여니 그렇게 기다리던 새 드릴이 누워있다.



"여보 이게 내가 말했던 그 드릴이야. The 드릴."


하는 말 끝엔 목이 메이고 닭똥 같은 눈물이 어룽어룽 적시었다.


"우리 남편 신났네?"


아무렴 그렇다마다.

90년 전 김첨지는 식은 설렁탕 앞에서 울고 끝났지만 난 드릴을 얻었다.



그동안 돈 좀 생길라치면 차 엔진이 갑자기 나가질 않나, 멀쩡하던 머플러가 갑자기 터지질 않나, 하나밖에 없는 청바지가 찢어지고, 30 평생 멀쩡하던 허리는 이제 와서 말썽에, 예산이 마감됐다고 올해가 마지막이던 청년 귀농인 정착 자금은 반려됐지, 난데없이 일어난 영토분쟁으로 당장 올해 안에 포크레인을 불러 길은 새로 내야 돼, 전기 끌어오기로 했던 아저씨는 감감무소식이야, 상금이나 재료비나 비슷하게 들어갔던 요리대회는 테이블 태워먹었다고 되려 보상금으로 뱉어내야 할 판이었는데,

결국 내가 한 번은 이겼다.



정말 오래간만에도 닥친 운수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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