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야근은 예측할 수 없고, 우린 대응만 할 수 있다
‘오늘은 어제 시작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아니 할 수 없다. 마지막 강의를 하고 나온 지금 죽을 것 같다. 죽을 것 같은 얼굴은 실은 아까 시작되었다. 보기 안쓰러웠던 착한 수강생들은 춘곤증 핑계를 대며 꾸벅여줬고, 나는 그 덕분에 수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 치열한 눈치 속에서 봄이 한창이다.
문제는 어제다. 이른 새벽을 깨워야 했던 일정이었기에 자정이 되기 전에, 그러니까 신데렐라가 집에 가야 했던 그 시간에는 의식을 잃어야 했다. 하지만 ‘춥고’ ‘덥고’가 시소 타는 아름다운 계절의 한 가운데서 아가는 뜨거운 코를 훌쩍였고, 육아 야근이 계속됐다. 우리는 아기가 천사가 되기를 기도하며 안고 엎고 안고 엎고 안고 엎고 안고 엎고 했고, 인내심이 바닥이 날 때 꿈나라로 보냈다. 그런 밤이면 내일은 없고, 야식이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또한 지나간다. 그런 시절엔 그런 시절을 보내야 한다. 매일 그렇지 않지만 매일 그렇게 되는 것만 막으면 된다. 야근의 4교시는 참을 수 없지만 2교시는 괜찮지 않은가? 그날의 만찬은 꿈에서 하면 된다. 2교시까지는 그럴 수 있다.
그런 생각을 지금 하고 있다.
그런 다짐을 어제의 나는 못했고, 오늘의 내가 한다. 아무쪼록 다시, 내일은 오늘 시작될 것이다. 오늘 밤의 내가 지금의 나이기를 기도하며 잠시 죽어야겠다.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