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5화 [오디션] by 색시
주간 <시선> 다섯 번째 주제는 '오디션'입니다.
작년 연말 즈음 논현동 어느 건물 지하에서 일주일에 걸쳐 모 뮤지컬의 배우 오디션이 진행됐어. 내 직책은 음악 조감독. 오디션 내내 한편에서 조용히 피아노 반주를 했어. 정말 ‘조용히’ 있어야 했다. 질문이라도 하나 했다 하면 감독님께 그렇게 욕을 먹었는데, 이때 눈치채고 일찍이 그만둘 걸 그랬나 봐. 뭐, 뮤지컬 자체는 좋은 경험이었어.
앙상블(주연 배우들이 연기하는 상황에서 같이 음악적 코러스 및 분위기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등장하는 역할) 배우들 오디션이 먼저 있었어. 나는 뮤지컬 일을 할 때 가장 좋았던 부분이 배우들의 에너지였거든, 지구 상에서 인간이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에너지를 집대성하여 구경할 수 있는 게 뮤지컬 음악팀 일이라고 생각했어. 보고 있으면 심장이 두근거려. 내 심신까지 역동적이 되는 것 같아 분명 나는 앉아있는데도. 앙상블 오디션은 배우들의 춤 비중도 높은지라 춤과 노래 둘로 나누어 오디션을 진행했어.
매 타임마다 열댓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오면 준비한 군무를 추며 몸을 풀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어. 짧은 시간이고 본격적인 오디션도 아니지만 사실 이때에 이미 몇몇 배우들이 눈에 띄어 뇌리에 박히지. 나는 심사하는 위치도 아니었는데 괜히 눈과 마음이 바빴다.
라이선스를 갓 사서 우리나라에선 초연인 뮤지컬의 오디션이라 무척 생소했을 텐데도 음악과 안무를 정확히 익혀 와 몸풀기 역시 실전처럼 열심히인 배우, 본 게임에선 어마어마한 걸 보여주겠지만 몸풀기에선 연막을 피우겠다는 의지가 엿보여 일부러 대충 추면서도 몸 선은 리듬을 제대로 타고 있어 나름 귀여운 배우, 준비를 안 한 건 아니지만 자꾸 손발이 박자에서 엇나가고 틀려 답답한지 스스로에게 조용히 성질을 부리는 배우, 소속사에서 등 떠밀어 우선 오디션에 참가는 했다만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아서 보는 내가 다 김 빠지는 배우.
본격적인 오디션에서는 두 명씩 짝을 지어 들어와. 한 명씩 보기에는 참가자 수가 많았나 봐. 모 방송사의 성우 최종 면접이 떠올랐어. 즉석에서 받은 대본을 두 명이 팀을 이루어 역할을 나누어 연기한대. 팀원을 누굴 만나느냐가 무척 중요하지. 운 좋게도 상대를 잘 만나 시너지가 난다면 둘 다 합격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 라이벌을 본인에게 유리하게끔 잘 끌고 가며 후회 없이 자기 어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가뜩이나 말도 안 되게 떨리는 자리에서.
그에 비해 이 앙상블 오디션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두 명이 같은 안무와 노래를 하며 경선을 치렀지. 둘 간의 실력차가 확연히 드러나 비교되는 팀도 있었고, 듀오로 당장 공연에 올려도 될 만큼 한 쌍의 명연기를 펼치는 팀도 있었고. 한 명이라도 잘했으면 다른 하나가 슬쩍 보고 따라 하면서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안타깝게 두 명 모두 꽝인 팀도 있었어.
열정은 보이지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배우들을 볼 때면 피아노에서 일어나 힘내시라며 소리라도 질러주고 싶었다. (물론 ‘조용히’ 있어야 하는 말단 조감독에겐 판타지에 불과했지.) 마음속으로 괜히 응원하는 배우들도 몇 생기더라니까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든 선택받아야 한다. 잘 보여야 한다. 준비한 만큼 딱 그만큼만이라도 보여주자, 그게 만일 모자라다면 하느님 부처님 반짝 운이라도 내려주셔서 준비한 것보다 잘 나오게 해 주세요, 마음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해.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혈관들이 요동치면서도 몸의 연주를 디테일까지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연기에 집중하는 배우들을 보니 그 초인적인 힘과 풍기는 기운이 결코 낯설지 않아. 꽤나 익숙해 정겨워. 내가 짧지 않은 대학 입시 기간을 거치며 지겹도록 겪었던 느낌이니까. 막판엔 전산오류가 나서라도 합격 두 글자를 보고 싶었던 벼랑 끝의 스무 살이 떠오르더라.
고2 막바지에 느지막이 시작한 음악이라 현역으로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만 그렇다고 삼수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현역 땐 무지로부터 오는 설렘과 즐거움이 컸기에 실기 시험장에서 딱히 떨 것도 없었고, 재수 땐 연습을 많이 해 놓고도 사시나무 떨 듯했다.
어중 띈 ‘앎’은 겁만 부추기더라.
앞서 얘기했듯 잿빛 토끼를 허구한 날 끼고 있으니 듣는 귀는 날로 좋아졌지만 그 양질의 템포에 비례해야 속 편한 연주 실력은 아쉽게도 매우 느리게 좋아졌다, 천부적인 재능도 딱히 없었고. 그러니 상대적으로 자괴감은 커져만 갔지.
지금 생각하면 참 용해, 실패만 겪어본 탓에 바닥난 자신감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울고 짜면서도 스스로 극한으로 밀어붙여가며 어떻게든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 스무 살이. 가끔 그립기도 하고. 덕분에 그때의 실기 시험 내용은 재수 때보단 나았어. 비교적 나았다 뿐이지 여전히 다리는 허벅지부터 달달 떨리고 호흡이 가빠지고 시험 본 학교들 중 절반에선 입시곡도 까먹었지만. (그러면 재수 때엔 도대체 어땠나 싶지? 그땐 손까지 덜덜 떨려서 거의 아무것도 못 치고 눈물 글썽이는 채로 시험장 뛰쳐나오는 모양이었어.) 평소 내 이미지가 나름 당차 보이나 봐, 내가 이 정도로 긴장하고 떠는 걸 아무도 안 믿었어. 선생님들께선 내가 시험 망쳤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허풍이라고 생각하셨는지 결과 발표날 자꾸 기대에 부푼 투로 붙었냐고 물어보시더라. 그리고 우린 모니터 앞에서 몇 배로 절망하곤 했지. 그러게 정말 망쳤대도…
마지막 시험에서 가고 싶은 학교에 기적처럼 붙었을 때, 청담1동 주민센터 1층에서 소리 지르다 경비 아저씨께 쫓겨났다. 전부 낙방이겠거니 하고 무인민원발급기에서 추가로 시험 볼 학교 원서접수에 필요한 서류들 뽑고 있던 중 합격 통보를 받았거든. 그때도 아직 손발 시리던 2월 초였는데, 이번 배우 오디션도 그즈음 발표가 난 걸로 알고 있어. 합격한 배우들 몇은 10년 전의 나보다 훨씬 정확한 발성으로 소리깨나 지르셨겠지? 나는 결국 극심한 긴장 탓에 정신과에서 약을 처방받아 가며 시험을 치렀어. 우습게도 유일하게 약을 못 먹은 학교가 붙었지만.
선장, 오디션을 합격하는 비결은 뭐였을까?
내 입시만 3년을 하고 학부시절 입시장에서 스텝도 해보고 졸업 후 크고 작은 오디션들 참가도 해보고 매년 내 학생들 모의고사 심사에, 이렇게 뮤지컬 배우 오디션에서 일도 해 보았지만 여전히 명쾌한 답을 하기가 어려워. 노력한다 하여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성공한 이들 중 노력하지 않은 이는 없다고들 하잖아, 노력과 끈기로부터 오는 담대함은 기본 옵션인 것 같고 그날의 컨디션과 기분을 관리하는 세심한 능력, 함께 혹은 앞뒤로 붙는 경쟁자들 및 심사위원과의 궁합을 좋게 해주는 천운 등은 추가 옵션인 걸까. 생각보다 열정을 갖고 자기의 한계를 시험해가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아. 어쩌면 한낱 인간인 우리로선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영적인 힘이 있는 건 아닐까? 난제다.
배우 오디션부터 시작하여 반년 넘게 악전고투하였던 조감독 일을 고민 끝에 그만둔 지 이제 한 달이 되었어. 쉴 만큼 쉰 것 같으니 다시 숨 고르고 나아가야지. 이다음 오디션이 있다면 심사위원이나 스텝이 아닌 참가자로 이름을 올려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이가 몇인데 여전히 오디션 참가는 상상만으로도 슬그머니 떨린다. 부드럽게 힘이 실린 활자로 응원해 줄 네 덕에 훅 - 따듯해지기도 하고.
추천 음악 : Arashi - Kite (カイ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