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5화 [오디션] by 선장
주간 <시선> 다섯 번째 주제는 '오디션' 입니다.
색시야, 생각해보면 나는 오디션이나 면접 경험은 딱 두 번 밖에 없었어. 그것도 면접관이었던 적 한 번, 지원자였던 적 한 번.
면접관이었던 적은 얼마전 너한테 보여줬던, 내가 각본과 연출을 맡은 단편영화의 배역 오디션 때야. 영화 관련 사이트에 공고를 올리고 난 뒤, 함께 단편영화를 찍기로 했던 조연출과 나란히 앉아 주연 남녀 배우를 뽑기 위한 오디션을 진행 했어. 배우 한 명당 20분, 총 15명의 오디션.
사실 그때쯤이면 머릿속에 주인공의 이미지가 꽤 구체적으로 잡혀 있어. 그러니 포트폴리오를 추려내는 과정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물론 사진만 믿다가는 실제 외모를 보고 반전매력에 놀랄 수 있으니 조심. 첨부해주는 연기 영상까지 보는 건 필수.
이제 오디션장에서 나와 조연출이 중점적으로 봐야할 부분은 캐릭터 싱크로율이었어. 외모는 원했던 이미지와 꼭 일치하는데 연기톤에서 엇나가는 경우가 왕왕 있거든. 특히나 입체적인 캐릭터의 여주인공 배역은 신경을 많이 써야 해서 어느새 면접관들 모두 예민해져있었어.
하지만 오디션을 보러 온 배우들의 긴장감에 비할 바가 되겠어. 그럼에도 모두의 대본리딩과 즉흥연기는 전부 개성있고 뛰어났어. 내가 한 명을 뽑아야 한다는 사실이 잔인하게 느껴질만큼. 오디션장에 걸음한 모든 배우분들이 빛이 났어. 연기에 대한 열망에 나까지 흥분됐다가도, 금세 그 간절함에 죄스럽기까지 했고.
‘특기’ 란에 판소리를 적어놓은 배우분도 역시 대단했지. 시간이 조금 남아 판소리를 보여줄 수 있냐고 조심스레 묻자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즉시 몰입하던 모습.소름이 돋더라. 단단하다 못해 딴딴한 소리꾼의 목소리가 면접장안 공기를 순식간에 바꿔버렸어. 목이 상할까 우려되어 그만하셔도 된다고 빨리 말씀드렸는데, ‘빨리’는 내가 느낀 상대적 시간이었더라. 끝나고 옆 방에 있던 동기들이 소리가 너무 울려 인터뷰를 중단해야 했다며 원성을 쏟더라고.
반대로 내가 오디션 지원자였던 적은 영화사 직무면접 때였어. 사실 내 이력은 객관적으로 봐도 영화 부문에 입사하기에 부족한 점이 많았는데, 운 좋게 덜컥 서류전형을 합격한거야. 영화 관련된 경험이 전무하였어도 다행히 글 관련 이력이 있어 덕을 본 것 같아.
그렇게 서류 합격 소식을 듣자 너무 흥분되고, 또 신이 났어. 그래서 면접 준비를 정말 공들여 했던 기억이 나. 인터넷 취업 카페에 가입해 모르는 사람들이랑 면접 스터디는 기본. 참고로 나는 뼛속까지 내향형 인간인지라, 남들 앞에서 말할 때 엄청 떨거든. 나는 SNL 인턴기자인 주기자를 보면 그 때의 내가 생각나서 마냥 웃지 못하고 짠하다니까. 하여튼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무조건 많은 연습이 필요 했어.
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거야. 한 번도 넘어보지 못 한 취업의 문턱이 막연하고 요원하고... 취업 가능성이 점점 희박하게 느껴질 수록 또 어찌나 더 간절해지던지. 디폴트 값의 나로는 남들보다 너무 부족해 보여서 아무래도 부족한 언변외에 +@를 준비해야겠더라고.
시간이 흘러 면접 날이 당도하고, 나를 포함한 총 세 명의 지원자가 세 명의 감독관 앞에 마주 앉았어. 나는 다른 지원자들과 엇비슷해 보이는 검정색 투피스 정장 차림으로 가운데에 자리했지. 그리고 어색한 공기에 적응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이내 신입사원 면접의 정석인 '1분 자기소개 스피치' 가 시작됐어.
내 왼편에 앉아있던 지원자가 허리를 꼿꼿이 피고 앉아 당당하게 자기 어필을 시작했어. 신입 면접이 아닌 경력 면접에 온 듯 떨지 않더라. 고고하게 일정한 피치를 유지하는 음성에 나는 기가 점점 죽었어. 애써 몇날 며칠 외워뒀던 자기소개를 속으로 복기하려 했지. 그럼에도 온갖 은유로 가득 찬 창의적인 문장이 귀에 쏙쏙 박혔어. 또 그 뿐이게, 영화 관련 경험은 또 얼마나 많던지.
청산유수와 같던 1분이 잽싸게 흘러가고 바로 내 차례가 와 버렸어. 아버지뻘 돼 보이는 세 명의 면접관이 별 기대 없는 졸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더라. 연이은 면접이 고단했는지 자못 엄숙한 분위기가 전반에 깔려 있었지. 두렵고 떨렸어. 하지만 어쩌겠어. 너무나 그 회사에 붙고 싶었고 또 그만큼 준비한 것들이 많은걸.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대뜸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리고는 꺼냈지. 그 전 주에 준비해뒀던 슬레이트.
'씬1에 1, 테이크1. 레디 슛’
비루한 슬레이트는 문구점에서 검정색 하드보드지, 흰색 테이프, 마카를 구매해 직접 만들었어. 갑작스러운 소품 등장이 무리수일까봐 면접 들어가기 전에 걱정이 많이 됐는데, 다행히 면접관들이 슬레이트를 보자마자 빵 터지더라.
그렇게 엉성한 핸드메이드 슬레이트를 친 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최대한 뻔뻔하게 자기소개를 시작했어. 테이크가 한 번 뿐인 컷이잖아. 공들여 찍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풀어진 분위기 덕에 질의응답까지 차분히 마칠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그 날 이후 나는 지원자들 사이에서 “네가 면접에서 대뜸 일어나 슬레이트 친 그 지원자냐” 며 회자되었어.
붙어서 정말 다행이지, 떨어졌으면 두고두고 이불 킥 했을 것 같아. 감사하게도 나는 그 날 면접을 본 70여 명 중 합격한 두 명 안에 들었어.
면접은 내 인생에서 제일 튀려고 안달했던, 돋보이고자 온갖 방법을 고민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야. 그리고 지금의 난 그 때의 열정이 부러워.
너덜너덜해진 슬레이트는 글자가 거의 지워진 채로 내 방에 전시되어 있어. 이제는 목표가 달라졌지만, 그렇게 동경하던 영화 업계에 발을 디딜 수 있게 해준, 지금의 꿈을 감히 꿀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슬레이트야. 그러니 당연하게도 버릴 수가 없네. 보고있자면 열정이 응축된 소리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강말금 배우님의 팬이 되어버린 영화 <자유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