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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May 12. 2022

초코우유를 줬다 뺏은 이유

시선 4화 [소중] by 선장

주간 <시선> 네 번째 주제는 '소중'입니다.



‘소중함’이라니. 요즘 피 튀기는 복수전과 청소년 학폭 이야기만 기획하다가 이렇게 따뜻한 주제를 쓸 수 있게 돼서 나 지금 좀 신났잖아. 그래서 평소보다 일찍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지. 내게 소중한 게 너무 많아서 벌써부터 마음이 넘쳐흐르고 애틋해져.


최근에는 친구 지영이의 사무실에 놀러 갔었어. 그런데 그곳에서 정말 오랜만에 지영이네 어머니를 마주친 거야. 전혀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조우에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얼어붙었어. 


그도 그럴게 지영이와 나는 중학교 때 친구인데, 그 시절 둘이 함께 있을 때마다 늘 사고를 쳤거든. 나의 부모님은 물론 지영이의 부모님까지 질풍노도의 딸내미들 때문에 골치깨나 아프셨을 거야. 당시 스스로도 신기했던 건, 나 혼자선 존재감 제로에 노잼 일상을 보내다가도 지영이와 둘이 되기만 하면 사건사고가 꼭 그렇게 쌍수를 들고 찾아오더라. 결국 지영의 어머니는 “선장과 지영이, 학교에서건 밖에서건 이야기도 하지 못하게 합시다.’라는 의견을 우리 집에 전해오셨어. 결단을 내리신 거지. 


사실 그런데 또, 중학생 친구사이 누가 말리겠어? ‘사고만 안 치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굴하지 않고 맨날 붙어 다녔어. 


하여튼 친구 어머니는 고등학교 교사셨는데,  기억 속에 강단 있고 엄격하신, 그리고 위엄 있는   때문인지 어딘가 동경하게 되는 분이셨어.


시간이 많이 지나 학교를 졸업하고 친구 집에 갔을  뜻하지 않게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언젠가부터는 웃으면서 맞아주시긴 하더라. 다행이었어.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흘러서겠지.  


그래도 나는 계속 친구 어머니가 어색했어. 아무리 옛날 일이라 쳐도 ‘나를 여전히 싫어하시겠지, 우리 둘이 친구인 게 내심 싫으시겠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나 봐. 그래서 그 친구 어머니 앞에서는 항상 마음이 움츠러들고, 더 잘 보이려 노력했어.


그런데 며칠  마주쳤을 , 친구 사무실 소파에 짐짓 어색하게 앉아있는 나에게 친구 어머니께서 다가오셨어. 그리고는 대뜸 초코우유를 건네주시더라.


잠깐 딴 얘긴데, 삐아프 알아? 하도 맛있고 고급지다고 소문나서 꼭 한번 먹어보고 싶은 초콜릿인데, 이미 색시는 먹어 봤을 거야. 사실 내가 사서 먹는 것보단 밸런타인데이나 기념일에 선물로 받고 싶었거든. 불운하게도 아무도 사주질 않았지만.


하여튼, 거기서 초코우유도 나오나 보더라고. 손바닥 만한 유리병에 삐아프 스티커가 작게 붙어있는, 딱 봐도 고급진 초코우유.


그걸 친구 어머니께서 내게 건네주셨어. 신나고 감사한 마음에 잽싸게 일어나 두 손으로 받으려는데, 어머니께서 아차, 싶으셨는지 다시 휙 가져가시는 거야.


나는 당황했고,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셨고, 썰렁한 정적이 일순 흘렀어.  


계속해서 뻗고 있던 나의 두 손바닥은 머쓱함에 움츠려 들었어. 무슨 일이신지 알 턱이 없던 나는 그저 어정쩡한 스쿼트 자세로 '다시 앉아야 되나 똑바로 일어서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지. 조금 생각해보니, ‘아, 직원분이 직접 드시려고 사놓은 건가? 그도 아니면 비싼 음료다 보니, 방문객 접대 용인가?’ 완벽 수긍 가능한 다양한 경우의 수들이 많더라고.


하지만 여전히 친구 어머니께서는 말없이 눈을 살짝 찌푸린 채 한참 동안 유리병을 바라보셨어. 아하. 나는 그제야 ‘유통기한 확인하시나 보다.’ 생각을 하려는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초코 우유병을 칵테일 셰이커처럼 거칠게 흔드시는 거야. 한 손은 뚜껑 위, 다른 한 손은 병의 밑바닥에 꽈악 안착시킨 뒤,  빠른 속도로. 정말로 정말 세차게 흔드셨다니까.


금세 상황 파악이 됐어. 물론 유리병에는 ‘먹기 전에 흔들어주세요’라는 간단명료한 말 따위가 적혀 있었겠지.


그런데 받는 사람이 그 글귀를 미처 놓쳐 다소 맹탕 같은 초코우유를 마시게 될까 봐 여러 차례 초코우유를 흔드셨던 친구 어머니의 모습. 신기하게도 우리 주제를 ‘소중’으로 정하자마자 그날 받은 초코우유가 떠올랐어.


사실 친구 어머니에게는 정말 별 일 아닌 자연스러운 행동이셨을 거야. 몸에 배어있는 섬세한 센스와 배려였겠지. 그래도 그때는 많이 바빠 보이셨기에 더 감사했어.


굳이 라벨지를 꼼꼼히 시간 들여 읽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까지 병을 세게 흔들지 않아도 충분했을 텐데. 기왕이면 제대로, 맛있게 마시길 바라는 마음이셨겠지, 또 괜스레 마음이 툭.


자연스러운 행동에 의미부여가 다소 과한 건 인정. 그래도 한참을 흔드신 초코우유를 내게 건네실 때의 따뜻한 표정을 떠올리면, 아. 의도가 어쨌든 소중한 순간이었어. 그 이후 나는 부쩍 친구 어머니를 만나 뵈면 그렇게 반갑더라고. 용서받은 듯 마음도 편안하고.  


완벽히 섞인 초코우유를 받아 한참 사진을 찍었어. 그러자 ‘아, 이거 어떻게 흔들어 놓으신 건데’ 싶어 급히 뚜껑을 열어 홀짝홀짝 마셨지. 역시나, 기분 좋게 달았어.




참 별거 아니지? 나는 일상 속에 마음을 툭, 하고 건드리는 작은 순간들이 소중한 것 같아. 그리고 그게 사소할수록 내 마음을 동하게 해.


건강 안 좋은 아빠 걱정에 스트레스받을 때, 내 방문을 닫아도 들리는 아빠의 엉망진창 노랫소리가 유쾌하고 소중해.


볕 좋은 날 카페에서 내가 두드리고 있는 노트북 타자 소리가 소중해.


양치하기 싫어 칫솔만 들면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고양이 옹심이의 민첩함이 얄밉지만 소중해.


친구들을 만날 때 고기 메뉴를 나 때문에 못 시키는 게 싫어서, “이제 다시 고기를 먹게 됐다”라고 거짓말을 종종 하곤 하는데, 이를 혼자 칼같이 알아차리고 내가 먹을 수 있는 것만 시켜주려 하는 친구의 마음이 소중해.


할머니랑 통화할 때면 내 말이 잘 안 들리는 게 뻔한데도 들리는 척 대충 넘어가시려는 뻔뻔함이 사랑스럽고 소중해. 더불어 점점 커지는 할머니의 목소리도.


친한 언니랑 함께 제주도에 놀러 갔을 때 내가 왕밤빵 15개를 술에 취해 혼자 먹어 치워 버린 걸로 엄청 놀리다가도, 그 후 내 생각났다며 무심하게 건네주는 모든 밤에 관한 아이템들이 소중해. 최근에는 밤쨈이었지. 어디서 구했나 몰라. (이 역시 놀리려고 그러는 거지만)


버스에 앉아 노래를 랜덤 플레이로 들으며 멍 때리고 있는데, 일순 창 밖에 해가 개고 타이밍에 맞춰 검정치마의 antifreeze가 흘러나왔던 순간이 소중해.


집에서 OTT 보는 시간은 늘 최고로 행복한데, 누군가랑 같이 봤던 때가 사실 더 소중한 기억이네.


맨날 식사 계산하는 친구한테 미안해서 친구가 화장실 간 새에 카운터로 가 미리 계산해달라고 했을 때, 이미 친구가 선수 쳐서 더 잽싸게 계산해 놨다는 걸 들을 때. 그 마음이 소중해. 그래 놓고 평소 같으면 야근에 지쳐 택시 타고 편하게 집에 갈 것을, 대중교통 탄다며 집에 가는 뒷모습은 속상하고 애틋해.


가을에만 나오는 스타벅스 시즌 메뉴 블랙 글레이즈드 라테가 소중해.


한없이 추상적이어서 못 알아먹다가, 갑자기 내 마음에 꼭 들어맞는 시가 발견되면 소중해.


아기 때 노노카 뺨치게 귀여웠던 사촌동생이 어느덧 스무 살이 넘어 카카오 기프티콘으로 추석 선물이라며 보내준 전복 선물세트가 소중해.


빗소리를 들으며 사각거리는 이불속에 있을 때 그 여유가 소중해.


오래된 사진 속 쌍둥이같던 언니와 내 모습이 소중해. 


나의 가장 약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들켰을 때 귀엽다며 웃어주던 표정이 소중해.


표현에 있어서 똥멍충이인 ESFP 친구가 내게 건네준 3장의 편지가 소중해. ‘다 줄 수 있었겠다’ 고 생각했다는 편지 글귀가 마음속에 콕 박혀있어.


아침에 옹심이 화장실 청소를 할 때 발견하는 건강 똥은 그날 하루 기분을 결정지을 만큼 소중해. 한때 변비로 애먹어 늘 토끼똥이었거든. 옹심이가 잘 먹고 난 뒤 깨끗이 비어있는 밥그릇도 소중하고.


친언니가 힘든 일에 처하자 자기가 도울 게 있을 것 같다며 언니 카톡 아이디를 알려달라는 대학시절 룸메이트의 오지랖이 소중해.


마지막으로, 무수한 생각이 넘쳐흘러 쓰고 싶은 말들이 많았을 텐데도 나를 생각하며 ‘게임’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할애해준 색시의 마음이 소중해.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내가 소중하다는 마음을 품게 되는 건 대부분 ‘옹심’과 ‘주변 사람’들 덕분이었네. 지치고 고된 일과 사이사이에 이렇게 따뜻한 주변 사람들이 툭, 하고 소중한 마음을 내게 놓고 가니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내색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내게 세상은 버틸 만 해지고, 나아가 아름다워지는 것 같아. 거창하게 들리는데 사실인걸. 재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서로 바라는 것 없이 애정만이 가득한 관계들이 전부 감사해.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너무너무 소중해.


색시야. 쓰면서도 내게 전부 귀한 순간들이라 마음이 간지러웠어. 색시의 소중한 순간들도 너무 궁금하다.






영화 추천: <플로리다 프로젝트, 2018>

누가 뭐래도 그들에겐 더없이 소중했을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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