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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May 07. 2023

무거운 소지품만 두어 개

시선 20화 [관계] by 선장

주간 <시선> 스무 번째 주제는 '관계'입니다.



같은 교복 입던 사이


색시는 학창 시절 친구들과 여전히 가깝게 잘 지내?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처럼 함께 있는 게 마냥 신나지가 않아. 슬프게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라고 부르기 애매한 ‘지인’이 그들보다 가깝게 느껴질 때도 있어. 친구들은 이제 처한 상황이 달라져 공감할 거리가 줄어드니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보다 과거의 추억팔이만 하게 돼서 그런 듯 해. 물론 이 역시 즐겁고 따뜻하지만 커진 몸에 맞지 않는 교복을 애써 입은 기분이라 늘상 편하진 않아.


대화의 두께는 얇고, 밀도는 낮고. 서로 다른 가치관을 굳이 재차 확인하지 않으려 정작 중요하다 느껴지는 주제는 빙빙 돌아 피상적으로 훑고 와. 수박 겉만 핥느라 단 맛은 못 느끼고 혀만 피로해. 그리고 가끔, 혹은 자주 나 혼자 동떨어져 외딴섬에서 다른 언어를 쓰고 있기도 하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만나는 일이 예전만큼 기대되지 않고 어쩔 땐 소모적으로 느껴져.


그래도 만날 때마다 한껏 유치해질 수 있는 건 학창 시절 친구들만의 특권이더라. 그래서 귀해. '철들지 말자'가 좌우명인데 하마터면 철들 뻔했다! 싶을 때 돌고 돌아 찾게 돼. 그러면 다시 정신 차리고 한껏 바보같이 솔직해질 수 있어.


아는 걸 넘어 서로의 역사가 되어버린 사이는 존재만으로 위안이 되나봐. 그래서인지 몸에 맞지도 않는, 오래된 교복은 아무리 이사를 다녀도 도통 처분할 수가 없어.





무거운 소지품만 두어 개


얼마 전 한 친구가 자신의 인간관계를 가방에 비유해 말해주더라.


20대 때에는 매고 다니는 가방이 늘 무거웠대. 이것저것 정말 필요한 친구와, 행여 필요할 지도 모르는 지인들을 전부 챙겨 넣고 다녔다는 거야. 그는 잔뜩 욱여넣은 자신의 보부상 가방이 항상 버거웠다고 해. 30대가 된 지금, 친구에게 여전히 가방이 무거운지 물으니 “내용물은 더 많아졌지만 오히려 총무게는 가벼워졌다” 더라. 한결 편한 웃음과 함께.


친구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나는 오히려 “양은 적고, 무게는 무겁게” 들고 다니고 있는 것 같아. 조그만 아령 몇 개를 가방에 넣고 다니는 거지. 그러다 보니 몇 안 되는 친구들을 너무나 사랑하게 돼 버렸어.


그래서 내가 색시에게도 말했듯 친구가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한 발짝 떨어져서 ‘그냥 들어만 주자‘의 자세가 되지 않아. 소수의 몇 명은 나한테 이미 친자매 같거든. 실제로 가족에게 그런 합리적이지만 냉정한 태도로 대하지 않잖아. 도무지 쿨하게 "냅둬, 지팔지꼰이지 뭐" 해버릴 수가 없어.


’친구‘ 란 명칭이 지나치게 포괄적이라 겪는 애로사항인 것 같아. 그 틀 안에 갇혀 얼마나 중한 사람인지 저평가될 때는 조금 안타까워. 실제로 ’가족‘이 된 형부보다 나는 내 친구들과 유대관계가 훨씬 깊은데 말야.





끼리끼리는 사이언스


그 이야기 들어봤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모르겠을 때에는, 요즘 나와 제일 자주 연락하고 가깝게 지내는 사람 대여섯 명을 떠올려보래. 친구, 가족, 연인 모두 포함. 그리고 그 다섯을 마음속에서 평균을 내 보면, 그 모습이 ‘나’에 가장 근접하다는 거야.


실제로 몇 년 전, 애정했지만 알게 모르게 속앓이를 하게끔 만드는 어떤 언니와 연을 끊은 적이 있었어. 처음에는 많이 속상하고 찝찝했지만 문득 저 ‘다섯 명의 평균’ 이야기가 떠올랐어. 그런데 언니가 최측근 다섯 인물에서 제외되자마자 그 평균의 값어치가 엄청 높아진 기분이 드는 거야. 머릿속으로 다섯이 아닌 네 명을 평균내본거지. 우습게도 내가 어느덧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었어.


의식하고 있던 것보다 언니에게 실망스런 부분이 많았나봐. '나한테만 좋은 사람이면 되지'라는 생각에 애써 누가 봐도 별로인 부분을 덮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해. 그렇게 편안하고 배울 점 있는 사람들만 내 주변에 남으니 헛헛함은 잠시, 이내 마음이 무척 가벼워졌던 기억이 나.


색시의 다섯은 어떨까. 친자매같으니 감히 참견하자면, 부디 다섯 모두가 색시의 자존감을 높일  있는 사람들이길 바라. 자랑스럽거나, 혹은 사랑스러운 사람들로만 채워져 길.





추천 작품: <써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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