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9화 [생일] by 선장
주간 <시선> 아홉 번째 주제는 '생일'입니다.
신입사원 때 신기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
때는 2016년. 영화배급사 막내였던 나는 곧 개봉할 영화의 편집본 시사에 한창이었지. 작은 극장 안에 직원 대여섯 명이 듬성듬성 떨어져 앉아 제각기 영화 관람을 했어. 영화는 아직 CG도 채 되지 않은 엉성한 상태였지만, 신입 버프 죽지 않은 나는 한 장면도 놓칠 새라 초집중 모드 ON.
영화는 흥미로웠지만 시사 장소는 너무나 조용하고 깜깜했어. 어느 정도 짬 찬 선배들은 하나 둘 고개 숙인 채 주억거리기 시작하더라. 버프 효력이 금세 떨어진 나 역시 졸음이 쏟아지려는데, 갑자기 스크린에 한 배우가 나오자 잠이 확 깨버리는 거야.
대사도 별로 없는 작은 체구의 신인배우인데도 말이야. 누구나 알 법한 대형 배우들 사이에서도 내 눈은 그 배우만 좇았어. 낯선데, 낯설지 않은 얼굴. 스무 살 남짓 되는 까무잡잡하고 여리여리한 여배우는 화면에서 사라져도 잔상이 남았어.
‘신인 확실한데. 어디서 봤지? 영화는 아니야. 웹드라마인가?’
한참을 소득 없이 되짚어보던 중, 줄곧 무표정하던 그 배우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어. 그러자 번뜩! 그 얼굴은 순식간에 추억 속 환한 소녀의 얼굴과 겹쳤고, 그제야 떠오르더라. 몇 년 전, 내 생일에 케이크를 든 채 해사하게 웃으며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불러줬던 그 소녀.
“생일 축하합니다~!”
2014년 내 생일날. 소녀가 양손에 든 건 커다란 미니마우스 케이크였어. 처음에는 거실 불을 전부 꺼 놓은 바람에 초에 비친 소녀의 얼굴만 보였는데, 둘러보니 열댓 명 되는 사람들이 다 같이 삥 둘러서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있더라. 모두가 그날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어. 조금 기묘하지? 아, 단 한 명 만을 제외하고. 옆에서 나보다 더 즐겁게 웃고 있던 복희.
복희로 말할 것 같으면, 대학 시절 미국에서 2-3년 남짓 함께 살던 친구야. 선배들이 늘 친한 친구와 자취하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읊어줬지만, 우리는 도전(?)했고 심지어 이겨(?) 냈지. 복희는 성인이 된 후에 만난 친구임에도 어릴 적 친구들보다 더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해. 같이 먹고, 자고, 생활하고, 어려움을 겪은 정이 마치 농축액처럼 진득해졌어.
언젠가 복희에게도 말했는데, 복희는 나에게 살짝 엄마 같다고 해야 하나.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그런 의미의 '엄마'가 아니고 그냥 우리 엄마. 신기할 정도로 복희와 나의 엄마는 닮은 구석이 많아. 특히 여리면서 털털한 부분.
‘털털하다’는 참 좋은 말인데 말이야. 이 털털함이 쉬이 ‘무심함’ 이 되고, 기어코 ‘둔함’까지 가면 늘 골치 아픈 건 상대방이거든. 그래서 엄마와 마찬가지로 복희도 나의 애증의 대상이 되곤 했어.
둔하고, 순하고. 때때로 눈치 없고, 항상 착해 빠졌고. 잘 울고,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가족 모두 한국에 있는 나와는 달리 복희는 이민자였어. 그래서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복희와 절절한 롱디를 했지. 복희와 떨어진 거진 2년 동안 치폴레, 파이브 가이즈, 리시스 씨리얼이 검질기게 꿈에 나왔다니까. 결국 미국 음식, 아니 아니 복희가 그리워 자구책으로 미국에 가기로 결정. 그렇게 나는 한국에서 캘리포니아로, 복희는 버지니아에서 캘리포니아로 비행기를 타고 LA에서 조우했어.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던 우리는 대형 규모의 한인민박에 체크인을 했어. 그리고 곧바로 디즈니랜드로 달려갔지. 생일에 디즈니랜드라니, 버킷리스트로 손색이 없잖아.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한 생일날이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더니 금세 달이 교교히 뜨더라. 민박집으로 돌아갈 때가 됐단 얘기지. 신났던 만큼이나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터덜터덜 무거운 발을 끌었어.
LA 한인타운은 빈민가에 맞닿아있어서 큰길로 걷는데도 전체적으로 소슬한 공기가 가득해. 우리에겐 초행길이니 더욱이 긴장을 풀 수가 없었어. 그런 낯선 길에서 한껏 경계태세였던 복희와 나는 겨우 민박집을 발견했고, 그제야 굳었던 어깨가 내려가더라.
그런데 뭔가 이상해. 도착해서 문을 열고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철거 직전 마냥 건물 전체가 깜깜한 거야. 해는 졌지만 아직 잘 시간은 한참 남아있었거든.
일단 현관문을 열고 조심조심 들어가 보기로 했어. 가뭇없이 이어진 계단을 올려보며 내렸던 어깨는 다시 긴장감에 굳어올랐지. 한발 한발 딛다 마침내 더 이상 오를 계단이 없었고, 거실로 통하는 또 다른 문을 여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어.
생전 처음 보는 여자 아이가 초가 켜진 케이크를 들고 환히 웃고 있는 모습. 그리고 곧이어 합창처럼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가 들려왔어. 둘러보니, 불이 꺼진 민박집 거실에 투숙객들이 전부 모여있더라. 마치 플래시몹마냥 일제히 케이크를 가운데에 두고 천천히 다가왔어.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으음'의~ 생일 축하합니다~”
맞아. 나는 '으음'이었어. 다들 아직 내 이름은 숙지 전이었나 봐. 나는 어쩔 줄 몰라 수굿한 채 고개를 떨궜어. 너무 놀라서 ‘당황’이 아닌 ‘황당’이 되는 기분 알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거야. 그러다 시선을 옆으로 돌렸는데, 복희가 세상 뿌듯한 표정으로 즐거워하고 있데? 아, 어쩐지.
복희는 나와 계속 붙어있었는데 언제 시간이 나서 이를 전부 준비한 걸까? 나 몰래 미리 케이크를 사놓고, 민박집 매니저에게 적당한 타이밍에 서프라이즈를 부탁해놓고, 그날 묵고 있는 투숙객들에게도 일일이 양해를 구하고. 무슨 남자 친구마냥 내 생일에 이런 이벤트를 준비했다니. 복희 엠비티아이 I 로 시작하는데 말이야. (검사를 다시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렇게 송구스러운, 아짐찮은 마음에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그때 띠링, 핸드폰에 이메일 알람이 울리데. 요란스럽지만 어색한 그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메일함을 열었어. 그냥 생일 축하 메시지 겠거니 했지. 그런데 정말 예상치 못 한 메일이 와 있더라. 또 한 번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몸이 굳었어.
보면, 다름 아닌 지원했던 영화 배급사에 붙었다는 최종 합격 메일이었어.
색시야, 내가 일전에 다니던 회사 있지? 글 서두에 나온 그 회사. 이렇게 캘리포니아에서 합격 확인을 했었어. 정말이지 이런 생일이 또 있을까. 복희와 나는 참지 못 하고 소리를 지르며 기뻐했어. 맨 정신에 나오기 힘든 텐션으로.
생일날,
직업도 모르는 한 소녀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절실했던 영화사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입사하고 몇 년이 지나서 보니, 그 회사에서 만든 영화에 그때 그 소녀가 연기를 하고 있고.
신기한 인연과 얽혀서 기억에 깊이 남는 생일, 그리고 영화야. 하지만 그보다도 그날 복희가 애써준 마음이 더 깊게 새겨져 있어. 복희를 떠올리면 고맙고 미안해 마음이 쪼그라들어.
둔하고, 순하고. 때때로 눈치 없고, 항상 착해 빠졌고. 잘 울고,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그렇게 짧디 짧던 캘리포니아 여행이 끝이 나고 복희와 나는 다시금 롱디가 되었어. 이젠 그런 휘황하고 다소 민망한 이벤트로 축하해주진 않지만, 매년 생일에는 어김없이 장문의 카톡을 보내와. 그러고 보니 복희를 만난 뒤 매년 내 생일은 이렇듯 빠짐없이 충만했네.
관련 영화 : <비밀은 없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