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19화 [성씨] by 색시
주간 <시선> 열아홉 번째 주제는 '성씨'입니다.
안녕, 선장. 서울은 비가 내리는 중인가? 부산은 비는 잠깐 멈췄지만 하루 종일 안개가 자욱해.
광안대교가 보이는 바닷가 오피스텔 창가에서 편지를 쓰는 중이야. 혼자, 근방에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고개를 들면 온통 푸르른 바다가 보이는 곳에 틀어박혀서, 듣고 싶은 음악을 원하는 볼륨으로 원 없이 들으며 공부하고 글 쓰고 싶어 잠깐 내려왔어. 현실에 치여 짧게 올 수밖에 없어 고민했지만 역시 오길 잘했어. 스물두 살 즈음부터 거의 매년 왔던 부산인데 이번엔 처음으로 실내에만 틀어박혀 있다. 그래도 행복해. 아, 이따가 저녁 약속 하나 있다.
어제 부산역에 내려서 택시를 잡아타고 숙소까지 오는데, 택시 기사 아저씨께서 혼자 왔냐고 하셔. 그렇다 답하니 어머님께서 허락하셨냐 하길래 저 삼십 대라 괜찮아요 하니까 놀라셔. 두 달 전 냈던 앞머리와 마스크의 더블 순기능. 아무리 그래도 딸 하나 타지로 여행 보내기 어려우셨을 텐데 하시길래 저 사실 결혼했어요 하니까 두 번 놀라셔. 신랑이 허락해 주었냐 하길래 저희 둘 다 아무렇지 않아요, 서로 하고 싶은 거 하며 재밌게 잘 살고 싶어요 하니까 요즘 젊은이들은 확실히 다르다며 세 번 놀라셔. 부산 싸나이 기사님을 이리도 놀래킨 요소들은 아마 내 고집으로부터 기인할지도.
나는 최 씨 고집의 최 씨. 해주 최 씨 좌랑공파 34대손
‘최 씨 앉은 자리엔 풀도 안 난다.’
‘최 씨에다 옥니이고 곱슬머리인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마라’ (다행히 나는 옥니도 없고 머리는 직모야)
‘산 김金가 셋이 죽은 최崔가 하나를 못 당한다’
그리고 어디서 보았는데 성격 더러운 성씨 순위에 최 씨, 이 씨가 나란히 1,2위로 랭크되어 있더라고.
응, 우리 부부야. 유유상종.
옛말은 틀린 게 별로 없다던데, 그리고 살아보니 정말 그렇던데 나는 어디에서 그렇게 고집을 부리며 살아왔는가.
꽤나 내 마음대로 살아온 것 같긴 해. 택시에서 나온 얘기들만 해도 그래.
나이에 걸맞은 외관이 무언지 잘 모르겠고 크게 관심이 있지도 않아. 대뜸 10대 때 냈던 짧은 처피뱅 앞머리가 다시 갖고 싶어 싹둑 잘라봤고, 어제는 날이 더워 끈 민소매 브라탑을 입었어. 랩톱을 이고 오기 편하도록 백팩을 메었고. 그저 내가 취하고 싶은 모양을 취하며 살다 보면 물 흐르듯 변하겠지라는 생각, 20대는 이래야 해 30대엔 이래야 해 유부녀는 이래야 해 요즘 이게 유행이래 자체를 귀찮게 느껴. 그래서 머리를 자르거나 옷을 살 때에도 주변의 의견을 구하지 않는 편이야. 주변에서 이상하다 해도 별 신경 안 쓰고 살았고. 내가 예쁘다 느끼면 그만이지 않나?
아, 이번에 머리 모양 바꿀 때엔 신랑에게 한 마디 물어봤다. 혹시 이것만은 하지 말아 달라 하는 모양이 있냐고. 매일 보는 이에게 이왕이면 최악을 선물하진 말자 싶어서.
여행도 그래. 혼자 여행을 선호하다 보니 커플로 여행을 가도 며칠은 따로 돌아다니자고 제안하곤 했어. 이 생각이 결혼 후에도 크게 변하진 않더라고. 부부니까 같이 여행하는 순간들도 당연히 귀하지만, 그렇게 같이 있으며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혼자 여행하며 느끼는 것 역시 귀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렇게 다채로워진 채로 일상에 복귀하여 뿜어내는 에너지는 또 얼마나 건강하겠어.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고 싶어요, 택시 기사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지.
언제나 “왜 그래야만 하지?”에 대해 생각해. 이유가 있는 것들도 많지만 생각보다 속이 텅 빈 채로 ~해야만 한다로 포장되어 있는 것들도 많은지라 그 선별작업을 착실히 해내려 노력해. 세상의 고집 아닌 고집들 틈에서 왜?를 외치는 게 내 고집인 것 같기도. 절대 ‘남들이 다 하니까’에 이렇다 할 근거 없이 휩쓸리진 않겠다는 신념.
아 그렇다고 무턱대고 반항하며 진보적인 척을 하고 싶진 않아. 그건 정말 없어 보여…
최 씨의 인성과 고집에 대한 말이 무성하지만 글쎄, 선장이 볼 땐 어때? 앞서 얘기한 옛말에 의하면 선장이 김 씨라 네가 살아서 셋 모여도 내 떠도는 영혼 하나를 못 이긴다는데, 아냐 선장이 셋이면 내가 질 것도 같아. 그리고 어제 그 택시 기사님은 도심의 일반 6차선 도로에서 시속 100km를 밟으시더라. 아저씨 성씨는 무엇이었을까 왠지 최 씨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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