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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Apr 30. 2023

결국, 사랑에 대하여

시선 20화 [관계] by 색시

주간 <시선> 스무 번째 주제는 '관계'입니다.



‘사이’라는 말과 ‘관계’라는 말의 차이. ‘사이’는 사람이나 사물 간의 거리를 칭하지만 ‘관계’는 엮여있는 모양을 칭하는 것으로 어쩌면 반대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기도. 우리 사이는 무슨 사이? 우리 관계는 어떤 관계? 사용처를 보면 느낌은 대충 비슷한데 말이야. ‘사이’는 퍽 캐주얼하고 ‘관계’는 진중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무 ‘관계’가 없는 이를 우리는 ‘남’이라고들 하는데, 생판 ‘남’의 기준은 어느 정도일까. 살면서 단 한 번도 스쳐 지나본 적 없는 사람, 간접적으로도 엮인 적 없는 사람, 서로의 존재 유무조차 모르는 사람? 요즘은 네트워크상에서 전 세계인의 조우가 가능한 세상이니 생판 ‘남’의 범주도 훅 줄어드는 것 같아. 인스타그램 친구 소위 말해 ‘인친’을 ‘남’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정 없어 보이는 희한한 시대랄까. 분명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사이’인데  ‘친구관계’가 되어 있잖아.


뉴욕에서 한 달 동안 표류하고 귀국하기 전 날 숙소로 돌아오던 길, 어떤 청년이 말을 걸었다. 여기에 살고 있냐 하길래 우선 그렇다고 했더니 매일같이 내가 지나던 블록의 모퉁이 가게에서 나를 지켜봤는데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나는 내일 돌아간다 하니 아쉽지만 그동안 매일 볼 수 있어 좋았다고 해주는 그 인사에 괜히 코 끝이 간질거리더라. 어둑한 밤길, 거리가 꽤 있는 채로 나눈 짧은 대화라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생면부지 타지 사람에게 느낀 찰나의 따뜻함은 분명 가까운 거리감을 형성했다. 그 청년과 나는 독대 한 번 한 적 없는 머나먼 ‘사이’, 하지만 야심한 밤 (따뜻했던) 잠깐의 대화를 나눈 ‘관계’, 현재는 ‘남’이다. 


보편적인 관계의 모양들은 사회에서 어느 정도 규정 지어진 채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그 실상은 놀랍도록 다양하다는 사실을 나날이 절감 중이다. 그 다양성에 대해 이분법적인 잣대를 들이밀지 않으려는 노력 역시 게을리하지 않고 있고. 특히 우리나라의 사회 풍토는 놀라우리만치 그 다양성을 절대악으로 치부하고 어떤 실체 없는 틀에 맞춰 일반화시키려 하는 분위기다. 혹은 반대로, 어떤 피해의식이나 자격지심으로부터 기인된 한낱 객기가 상당히 progressive 한 사상 따위로 간주되어 삽시간에 퍼지고 유행이 되곤 하지. 


진정 영양가 있는, 본질적인 잣대를 세우고 싶다는 욕구가 일어.


부모 자식 관계여도 서로를 책임지지 않을 수 있더라. 친구 관계이지만 몇 년이고 안부를 묻지 않을 수 있고, 연인 관계라 해서 자주 전화 통화를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사제 관계에 사랑이 싹틀 수도 있고 부부 관계에 서로가 어디서 뭐 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고부 관계에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상담사가 될 수도 있으며 상사와 부하 관계에서 뚜쟁이가 탄생할 수 있다.  또, 역전에서 길을 물어보는 외국인을 따라나서 일일 가이드와 관광객의 관계가 될 수도 있고, 남산 둘레길에서 심심하여 말 몇 마디 나누게 된 이와 인생 선후배 관계가 될 수도 있다. 뭐 멀리 보나, 퍼포머와 관객에서 부부 관계가 된 나도 있는걸. 


꽤나 진중한 이 ‘관계’라는 말로 사람 간을 정의 내리고, 그를 깊이 있는 양질의 관계로 지속하고자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다양성을 존중하려면 기본적인 ‘애정'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랑’이라고 꽤 진지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어. 부모님을, 친구를, 연인이나 배우자를, 학생 및 스승을, 부하직원이나 상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가장 어려운 것. 그게 사랑 같아. 


관계에 있어 기대했던 값이 채워지지 않더라도 그대로 사랑해 주는 거지. 없던 관계는 피어날 수 있고, 있던 관계는 각자의 모양대로 자유로이 춤을 추며 한껏 아름다운 모양이 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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