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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Sep 25. 2022

위로 중독

시선 12화 [위로] by 선장

주간 <시선> 열세 번째 주제는 '위로'입니다.



[위로 중독]

 

잔뜩 지친 날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위로가 되는 노래 한 곡을 반복 재생하며 듣곤 해. 피로한 와중에도 최대한 가사에 집중하려 하지. 잘 들리지 않으면 굳이 화면을 켜서 찾아 읽어. 그리고 가사에서 벗어나 행여 딴생각으로 정신이 분산되기라도 한다면 다시 곡을 처음부터 재생해. 그렇게 무한반복.


사람에게 위로받지 못하는 나는 그런 식으로 노래 하나에 기대고 또 매달리게 돼. 곡의 한 단어, 한 문장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강박을 갖고 절실히 들어. 곡을 만든 이가 의도한 위로를 전부, 최대한 흡수하려는 노력은 가상할 정도야.


요즘 이런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양질의 '위로 관련 콘텐츠'가 넘쳐흐르고 있어. 여러 이유로 사람에게 직접 받을 수 없는 위로를 비대면으로 얻는, 바야흐로 감성 글귀 대홍수의 시대지.


어쩌면 이렇게나 많이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위로하는 글들이 넘쳐나는 걸까. 물론 내겐 감사한 일이다만, 지향점이 행복과 평안인 그 글들을 보고 있자면 오히려 조금 절망스러울 때가 있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만큼 우울하고 고되길래, 하는 생각에.


인스타그램으로 위로글 몇 개를 연이어 봤더니 추천 게시물로 감성 글귀들이 쭈욱 큐레이션 되더라. 마음에 와닿는 글들을 캡처하다 보니 사진첩에 위로 글귀가 넘쳐흘러 따로 폴더를 만들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어. 이런 게 위로 중독인가? 문득 스스로가 걱정되더라. 온갖 따뜻한 말들에 익숙해져 그 어떤 위로글에도 무뎌지면 어떡하지. 희망 어린 말에도 내성이 생길까 두려워.




[위로의 방법]


색시야.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은 참 어려운 것 같아.


친구건 연인이건 관계에 있어서 나는 항상 말하는 쪽보다는 듣는 쪽이었어. 심지어 그리 가깝지 않다 생각했던 지인이 지나치게 사적인 고민을 토로하는 경우도 잦아, 상담대학원 진학을 고민하기도 했지. 들어주고 또 위로해주고 하는 재능이 내게 있는가, 싶었어.


그런데 사실 매번 어렵더라.


“힘내”라는 말이 상대에게 부담된다는 말은 흔히들 하잖아. 그래서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말이 이를 대신해야 한다며 종종 들리던데, 그 말은 간혹 무책임하게 들리지 않아? 또, 누군가에겐 “나 역시 그랬어”라는 말이 위안이 된다는데 난 반대로 “전형적이지 않아”라는 말이 여태 들어본 최고의 위로였어.


그저 멀찌감치 서서 듣기만 해도 충분한 걸까? 물론 귀중한 시간을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이미 객관화를 잃어 혼란의 구렁에 빠져있을 때는 그 이상이 필요하기도 해. 제 3자의 솔직한 시선 말야. 익숙해져 버린 절망은 다른 사람의 의견으로 환기되기도 하니까.


이렇듯 사람마다 어떤 특정 단어나 말에 대한 수용도와 민감도가 다르고, 공감과 조언 중 무엇을 어느 정도 더  원하는지도 다를 테지.


그때 내가 감히 어떤 말로 그 아이를 위로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 정도는 이야기해도 되겠지. 오히려 도움이 되겠지’ 싶은 말이 상대에게 비수가 된 적이 최근에 있었어. 나름 최대한 조심스레 말을 고르고, 또 오지랖을 부리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벌어진 일이었지. 그 후 나는 혼란과 후회에 며칠 밤을 뒤척이고, 이미 보수적으로 정해졌던 내 나름의 위로법을 더 보수적으로 만들었어. 꽤 힘들더라. 상담대학원은 무슨, 나는 깜냥이 절대 못 돼. 포기야, 포기.




[위로의 거리]


애쓸수록 멀어지는 게 있더라.


위로 방법 말고도, 사실 대부분의 마음가짐이나 행동들이 그랬던 것 같아. 사회생활이든, 친구든, 연애든, 심지어 육묘든.


반려묘 옹심이가 지금보다 더 아기 고양이였던 시절, 변비 낌새가 아주 살짝 보이기 시작했어. 그래서 이를 해결하고자 온 인터넷을 뒤져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했지. 그런데 방법을 추가할수록 상태가 악화되어만 가는 거야. 옹심이는 결국 처음 아무런 시도를 하기 전보다 더 변비가 심해졌어.


그래서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 그냥 ‘살짝의 낌새’에서 내버려 뒀다면 이지경까지 오진 않았을까? 노력할수록 더 잘 안 되는 상황 탓에 마음이 너무나 힘들고 혼란스러웠나 봐.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반대로 어쩌면 내 노력이 부족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 노력할수록 상황이 안 좋아졌던 게 아니고, 더 준비된, 완벽하게 잘 알아본 최선의 노력이었다면 해결되지 않았을까. 이렇듯 한때는 사회생활이든 연애든 육묘든 애쓸수록 요원해진다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저 덜 애쓴 걸 지도 모르겠어.


그래. 그냥 그 아이를 위로하는 데 있어서도 내가 부족했던 거겠지. 윤대녕 작가가 그러더라고. "네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으면, 그냥 네가 이해 못 하는 거다."라고. 아무리 여러 번 생각했다 싶어도, 더 더 많이 생각했어야 하나 봐.


그래도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일은 이제 적당히 하려 해. 누구나 완벽할 순 없고,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고.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있고, 어떻게든 전해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 거니까.


하지만 관성처럼 내가 진심으로 아끼는 몇 안 되는 사람에겐 계속해서 최선의 위로를 해주려 애쓰겠지? 어쩔 수 없이 가족마냥 이입하게 되니까. 목표는 '그저 들어주되, 방관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게끔 적당한 선을 지키기'인데 말야. 그러려면 남일이라 생각하고 적당히 이입해야 하는데, 나는 그래야 한다는 사실이 또 조금 슬퍼. '남일', 너무 냉정한 단어야.


지금은 그저 큰 마음먹고 나에게 내밀하게 보여준 상처가 덧나지만 않았으면 해. 위로까진 안됐더라도 이야기한 후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지면 좋겠어.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되고 싶지만, 늘 내 상처는 보고 싶지 않아서 회피하게 되네. 언젠가 이 또한 마주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영화 추천: <최악의 하루, 2016>

본인 의지 없이 난관에 놓여버리는 '배우'와 자신이 만든 세상 속 무책임하게 인물들을 난관에 몰아넣는 '작가'. 두 인물의 만남이 흥미롭다. 그리고 지친 하루 끝 서로에게 주는 위안이 절묘하고 애틋하다.

몸짓으로, 표정으로, 그리고 통하지 않는 언어로 위로를 한다. "괜찮아요. 이번엔 해피엔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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