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3년 전, 국립경주박물관에 새로 문을 연 도서관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전시를 관람하느라 정작 도서관은 들르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유물들에 푹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하늘은 캄캄해졌고, 운영 종료를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시간이 흘러, 이번 여름에 당일치기로 다시 경주를 찾았다. 낮의 박물관은 겨울의 기억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다. 뜨겁고 화창한 날씨 아래, 하늘로 뻗은 지붕선은 전통 기와의 형태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모습으로 익숙함과 신선함이 한데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풍겼다.
박물관 부지 안에 자리한 도서관은 '신라천년서고'라 불린다. 단순한 학습 공간이 아니라, 휴식에 초점을 맞춘 공간으로, 방문객들이 편히 쉬며 책을 통해 신라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신라천년서고는 1979년에 지어진 서별관을 리모델링해 조성되었다. 처음에는 사무동, 이후에는 수장고로 쓰이다가 현재의 도서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건물은 박물관의 주요 동선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 월지관 뒤 대나무 숲을 지나 돌계단을 내려가거나 고청지를 돌아가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이정표가 없다면 찾기 어려운 위치지만, 건물 외관은 박물관 부지 내의 신라역사관과 닮아 있어 낯설지 않다. 흰 콘크리트 벽 위에 전통 기와지붕을 얹은 절충적인 형태로, 1970년대의 전통과 현대가 섞인 건축적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도 이러한 외관은 유지된 채, 내부 공간을 도서관 기능에 맞게 최적화하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였을까. 변화 없는 외관을 보고 몇몇 방문객은 고개를 갸웃하거나, 살짝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인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안과 밖의 놀라운 반전의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면에 놓인 신라 석등이다. 그 뒤로 펼쳐진 커다란 창문은 수장고 철거 과정에서 발견됐는데, 창 너머로는 대나무 숲과 월지관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비쳐 들어오며 고요하고 사색적인 풍경을 완성한다.
이 석등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다. 신라 석등은 진리를 비추는 빛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놓인 석등은 서로 다른 시대의 부재로 조합된 불완전한 유물이지만, 실내라는 맥락 속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낸다. 밖에서는 평범해 보였던 유물이 공간의 중심을 장악하는 순간, 유물은 그 자체로 새로운 해석을 획득한다. 이것이야말로 맥락 속에서 다시 빛나는 유물의 힘일지도 모른다.
도서관 내부의 구조는 건축적으로도 인상적이다. 특히 천장의 디자인은 해인사 장경판전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되었는데, 목가 구조의 단순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형태가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운다. 이는 전통의 깊이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결과다. 또한 좁은 공간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창을 충분히 내고, 천장에는 거울을 덧붙였다. 그 결과, 실제보다 훨씬 넓고 깊게 느껴지는 시각적 확장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곳의 이름처럼, 신라천년서고에는 신라와 불교문화에 관련된 서적은 물론 전시 도록, 유물 자료 등 폭넓은 콘텐츠가 보관되어 있다. 서가 옆에는 다양한 형태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어 누워서 쉬거나, 앉아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자유롭게 체류할 수 있다. 이곳은 '도서관'이라는 개념을 넘어선 휴식의 공간이다.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든, 조용히 눈을 감고 명상을 하든, 이용자는 눈치 보지 않고 이 공간을 즐길 수 있다.
도서관 정면의 석등을 기준으로 왼편에는 '북큐레이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큐레이터와 사서가 엄선한 도서들을 선보이는 공간으로, 전시에서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한 신라 관련 주제와 깊이 있는 자료들을 책으로 이어 볼 수 있게 한다. 사서의 추천 도서는 물론, 이용자들이 자주 찾는 책까지 더해져 이 공간은 도서관의 하이라이트라 불린다.
이곳에서의 큐레이션은 단순히 책을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서, 박물관과 독자 사이를 연결하는 또 다른 전시 방식이다. 진열장이 아니라 책장이, 해설 패널 대신 책갈피가 관람객에게 말을 건네는 셈이다. 전시장에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의문이나 감정을 이 큐레이션 공간에서 다시 마주하게 된다.
신라천년서고는 비록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힘이 있다. 유물 앞에서 긴장을 풀고, 편히 앉아 책을 읽거나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박물관의 권위는 조금 누그러지고, 일상이 조금 더 가까워진다.
오랜 시간이 층층이 쌓인 박물관과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주하는 이 공간은 단순한 '기억의 장소'에서 나아가, '생활의 장소'로 확장되고 있다. 마치 과거의 수장고가 오늘날의 쉼터로 탈바꿈했듯이, 이 도서관 또한 끊임없이 의미를 덧입으며 앞으로 '경주의 시간을 품은 거실'처럼 기억되지 않을까.
글, 사진 | citevoix
- 운영시간
평일 10:00 - 18:00 매월 첫째, 셋째 주 토요일 / 주말(둘째, 넷째 주 토요일) 휴무
- 국립경주박물관 주차장 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