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씨 묘지
다른 곳엔 가지도 않고 파리에만 일주일 머무르는데도,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여행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이번이 두 번째 파리 여행이었기 때문에 도합 2주일을 보내는 셈이었는데도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바로 이것이 도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었다. 오래 머물러도, 계속 방문해도, 가고 싶은 곳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솟아난다. 심지어 이미 갔던 곳에 또 가도 좋았다.
파리를 떠나기 이틀 전 아침, 파씨 묘지를 산책했다. 파씨 묘지는 트로카데로 역 인근에 있었다. 구글 지도를 구경하다가 ‘파씨 묘지’라는 장소를 보고 숙소 사장님께 “여기 어떤가요?”라고 여쭤봤더니, 크지 않은 묘지라 여기보다는 20구에 있는 페흐 라셰즈 묘지에 가보는 게 좋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파씨 묘지로 향했다. 숙소에서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인 데다가 루이뷔통 재단 미술관에 가는 길과 겹쳤기 때문이다.
묘지에 나뿐일 줄 알았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사람이 좀 있었다. 나처럼 산책하는 사람, 가족 단위로 애도하러 온 사람, 묘를 관리하는 사람 등이 섞여 있었다. 물론 인파가 많지는 않았다.
작은 묘지라고 했지만, 생각보다는 넓었다. 한쪽 벽면에는 구역을 나누어 놓은 지도도 있었다.
내가 파리에 머무르는 대부분은 하늘이 흐렸고 비가 내렸다. 이날도 하늘이 잔뜩 흐려 있었고 이슬비가 내렸다. 그래도 날이 흐린 덕분에 덥지 않고 시원해서 좋았다. 우산을 들고 다녀야 하는 귀찮음만 제외하면, 무더운 거리를 걷느라 열사병에 걸리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게다가 회색 하늘의 파리도 아름다웠다. 어두운 하늘, 회색 묘비가 에펠탑과 함께 하는 풍경이 마치 그림 같았다.
기대를 별로 하지 않고 왔는데,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중 한 명인 에두아르 마네의 묘를 발견한 것이다.
마네를 만난 것 하나로 이곳에 온 이유는 충분했다.
마네의 동생이자, 그의 문제작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모델로도 등장했던 외젠 마네와 그의 아내였던 화가 베르트 모리조도 함께 잠들어 있었다.
베르트 모리조는 인상파 화가 중 한 명이다. 영화 <마네의 제비꽃 여인 : 베르트 모리조, 2012>에 의하면,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마네를 만났고 이후 마네의 모델이 되었다.
마네의 <발코니>에 등장한, 마치 스페인 사람처럼 보이는 짙은 흑발의 여성이 모리조이다.
두 사람은 서로 끌렸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마네는 이미 기혼이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마네의 동생 외젠은 모리조에게 반하고, 결국 그녀는 외젠과 결혼한다.
사실 영화는 ‘모리조가 미혼일 때 마네의 모델을 여러 번 했다’라는 팩트를 기반으로 창작한 픽션이다.
실제로 모리조와 마네는 결혼으로 맺어진 사돈 관계, 화가로서의 사제 관계 정도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스토리가 매력적인 건 사실이다.
모리조는 뛰어난 인상파 화가이기도 했다. 파리 16구 라뮤에뜨에 있는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 그녀가 쓰던 가구와 집기,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마네의 묘에 동생 외젠과 그의 처인 모리조가 함께 묻힌 걸 보고 왜 하나의 묘에 여러 사람이 매장되어 있는 걸까 궁금했다. 숙소 사장님께 여쭤보니 보통 파리의 묘지는 가족묘라고 하셨다.
규모가 크고 더 유명한 페흐 라셰즈 묘지가 아닌, 파리 서쪽 외곽의 파씨 묘지에 가족묘가 있다니 마네 집안사람들은 모두 파리 16구에 살았던 걸까.
모리조의 그림들과 가구가 16구의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 있는 걸 떠올리면 꽤 신빙성이 있었다.
영화 <마네의 제비꽃 여인 : 베르트 모리조>에서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해 주인공들이 피난 가는 장면에서도 배경으로 파씨가 등장한다.
파리를 떠나는 날이 하루 이틀씩 가까워지며, 오늘은 어디를 가야 할지 초조했었다. 관광객이 아닌 생활자로서의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일주일 남짓 머무르는 여행자에겐 여유로운 일정이 사치라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맞았다. 파리에 머무를 시간이 단 이틀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 얼마 안 남은 시간을 쪼개어, 볼 것 없어 보이는 동네 묘지를 산책했던 풍경들이 파리를 떠난 지금에도 기억에 남아있다. 파리의 경계에서 흐린 날의 에펠탑을 보았고, 회색 에펠탑이 쥐색 하늘, 잿빛 묘비와 어우러진 풍경은 왜 이 도시에서 뛰어난 예술가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 깨닫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곳에서 내가 사랑하는 위대한 화가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