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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티하이커 Dec 09. 2020

솔직하지 못해서

Prologue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씌어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이다. - 피천득, <인연>


글쓰기에서 시작해서 글쓰기로 끝난다.


내 삶의 모든 지점은 글을 쓰는 행위로 이어진다. 여행을 떠날 때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심지어 일을 할 때도, 마음 한 구석에는 글쓰기를 염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장래희망'은 글쓰기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열심히 읽기만 하다가, 사소한 이야기라도 블로그에 꾸준히 적기 시작한 것은 2015년부터다. 처음에는 여행기를 썼다. 그러다가 회사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는 일련의 상황을 겪으며 짧은 에피소드 형식의 습작을 썼다.

국문학도도 아니고, 소설을 쓸 만큼 풍부한 인생의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문장력이 뛰어나지도 않았지만, 궁지에 몰린 생쥐 같은 심정이라 무엇이든 '써 내려가' 마음의 앙금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비루한 글쓰기 하나뿐이었으므로.

일기를 쓰지 않고 소설을 썼던 이유는 상황을 객관화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기를 쓰고 내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면 그저 투정이 될 것만 같았다. 단순한 불평에 그치지 않기 위해 소설을 썼다.

짧은 연작소설을 썼던 지난 몇 달간, 내 삶은 조금 달라졌다. 모든 경험이 글쓰기의 자양분이 되었다. 힘들었던 경험은 스토리를 더 풍부하게 만들었으며, 삶에서 부대끼는 수많은 사람들은 소설 속 등장인물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수필을 쓰고 싶은 걸까, 소설을 쓰고 싶은 걸까?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종종 나의 글을 읽는 Y는 수필을 쓰는 내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난 언니를 잘 아는 사람이라 그런지, 소설에 숨겨진 언니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져."

그래도 난 자주는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은 소설을 쓴다. 솔직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나를 온전히 드러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허구의 이야기를 쓴다.

솔직하지 못해서 때때로 소설을 끄적인다. 논픽션인 수필에는 허구를 섞을 수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순수 수필인 이 잡문집은 순도 100%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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