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역삼동
2016년 8월 17일 수요일
8월 초부터 시작된 무더위는 중순을 넘어서며 더 뜨거워졌다. 낮엔 종로 일대에서 뙤약볕을 맞으며 걷고, 해질 무렵엔 강을 건너 D와 함께 역삼동으로 향했다. 불과 보름 만에 세 번째 방문이었다.
새로운 술을 만났다. <술꾼의 품격>에서 소개된 칼바도스였다.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서 주인공들이 즐겨 마신 술이었다. 칼바도스 지방에서 증류한 브랜디의 일종이다. 이 지역에서는 포도가 재배되지 않아 사과로 브랜디를 만들었는데, 프랑스는 포도가 메인이라 사과 증류주인 칼바도스는 낮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개선문>에 등장하는 고급 클럽 셰라자드에서는 칼바도스를 팔지 않고, 에뚜알 광장 근처 서민적인 카페에서 칼바도스를 판다고 주인공이 언급한다.
칼바도스는 보기와는 다르게, 생각보다 알코올 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아무 생각 없이 무턱대고 코를 박고 향을 맡다간 콧구멍을 통해 알코올이 흘러 들어가 영혼까지 털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마치 화학 시간에 유독 액체의 향을 맡든 손바닥을 휘휘 내저어 향을 맡아야 할 판. 그래서 브랜디 잔은 입구가 넓은 걸까.
염원하던 칼바도스를 마시고 매우 흡족했다. 자주 마시는 술은 아니지만, 그날부터 나의 칼바도스 사랑이 시작됐다. 이날 마셨던 칼바도스는 듀퐁 V.S.O.P였는데, 이듬해 방문했을 때에는 뷔스넬밖에 없었다. 듀퐁이 향도 싱그럽고, 병도 예뻤는데 아쉬웠다.
매니저님은 가성비가 뛰어난 버번위스키도 추천해주셨다.
미국 켄터키주에서 생산되는 버번위스키는, 보리로 만드는 스카치위스키와 달리 옥수수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날 마셨던 버번위스키의 이름은 ‘올드그랜드대드’. 사실 '켄터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KFC인데, 같은 켄터키주에서 만들어진 버번위스키 또한 할아버지를 모델로 하고 있는 점이 인상 깊었다.
옥수수로 만들어졌으니 옥수수맛이 나는 게 당연하겠지만, 올드 그랜드 대드는 꼬깔콘 군옥수수맛을 씹는 듯한 구수함이 느껴진다. 도수 40짜리 옥수수수염차를 마시는 듯한 느낌이랄까.
이 위스키 덕분에 버번위스키는 단숨에 스코틀랜드에서 만들어진 위스키들을 제치고 내 마음속 우선순위로 들어왔지만, 아쉽게도 그날 이후 올드 그랜드 대드는 품절이 되어 그 이후로 다시 볼 수 없었다. 상당히 저가라고 하는데, 내 입맛에는 이보다 비싼 ‘놉 크릭’보다 훌륭했다.
이곳에는 영업왕이 있었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 안주로 깔조네를 시키자 까르보나라가 더 맛있다면서 8월 절판마케팅을 펼쳤던 분이었다.
"사실 깔조네보다는 파스타가 더 맛있어요."
그래서 깔조네를 먹어봤다니, 정말로 파스타가 더 맛있었다.
"아, 정말 까르보나라가 더 맛있네요. 그걸 한 번 더 먹을걸.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셰프님이 8월까지만 근무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에 서운한 투로 말했다.
"괜찮아요. 아직 8월은 많이 남았잖아요. 다음에 까르보나라 드세요."
영업왕 K 씨의 권유대로 차돌박이 까르보나라를 주문했다. 그의 영업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혹시 알리오 올리오도 드셔 보셨나요? 전 알리오 올리오가 제일 맛있더라고요."
제일 맛있는 메뉴라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셰프님이 떠나기 전, 8월이 지나가기 전에 다시 오기로 했다.
"지난번에 럼을 좋아하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네, 맞아요."
"이건 파는 건 아니고 제 사재인데..." 라며 냉동고에서 가정용 바카디 8년을 꺼내셨다.
바카디는 칵테일에 사용되는 투명한 바카디 슈페리어만 구경해 보았는데, 바카디 8년은 하바나 클럽 7년처럼 황금빛이었다.
D와 함께 바카디 8년을 한 잔씩 얻어 마시며, 화제를 옮겼다. 당시 한남동에서 열리는 칵테일 위크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각자 7월에 <2016 베스트 바 50>을 사두었는데, 그 책을 펴놓고 어디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했다.
"그 책을 사신 거예요?"
"네. 인터넷 서점에서 팔던데요."
"이런, 저희 가게에 많이 있는데..."
K 씨는 바 뒤편 구석진 곳에서 두 권의 책을 꺼내 우리에게 건넸다. 조금 더 빨리 K 씨를 만났어야 했다.
두세 번째 손가락 길이만 한 서비스 칵테일. 술이 절반, 과일 주스가 절반이 들어가 상당히 맛있다. 술을 못하는 사람도 무난하게 마실 수 있을 듯한 작은 잔에 담긴 칵테일. 이름은 슈터였다.
지난 두 번의 방문 모두 매니저님 N 씨가 슈터를 주셨지만 그날은 달랐다. 부산 사투리가 인상적인 J 씨의 슈터였다.
어릴 적 마셨던 파워에이드처럼 청록빛이 선명한, 그 칵테일의 이름은 '부산 앞바다'였다.
"제 고향은 부산이에요. 서울에 온지는 2~3년 됐어요."
영롱한 색채처럼 산뜻한 민트향이 솔솔 풍기는 매력적인 칵테일이었다. 우리는 나중에 그분을 창작 칵테일의 달인으로 불렀는데, 그는 언제 어느 때나 200개 이상의 창작 칵테일 레시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럼, 테킬라, 브랜디, 버번위스키 등 다양한 맛과 향을 접했다.
충분히 많이 마시고 배웠지만, 셰프님의 알리오 올리오 때문에 다음을 또 기약했다.